눈부신 안부-백수린
묵을 대로 묵은 오래된 부부의 일상보다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평생 서로 그리워하는 연인의 이야기가 사랑이고, 매일 짜증 내고 싸우는 사춘기 자녀를 둔 북새통 가정보다는 조건 없이 헌신하고 이해하는 부모가 있는 우아한 가정이 완성된 사랑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러나 나의 결혼 생활 동안이나, 아이의 사춘기로 온 집안이 들썩이던 몇 년을 돌이켜 보면, 사랑이 커지고 깊어지기까지 결코 아름답고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았다.
처음에 나는 이러한 성장의 과정을 전쟁처럼, 혹은 완수해야 할 의무처럼 여긴 것 같다. 아이가 잘 크도록 단도리를 하고, 잔소리도 하고, 챙겨주고... 이상하게도 일상의 전투에서 이기면 이길수록 진실로 알아야 할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사랑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하다면, 이 싸움은 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노력할수록, 애쓸수록, 잘해보려던 순간들이 번번이 실패로 점철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나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함을 한탄했다. 그러나 내 헌신은 상대가 바란 것도, 상대가 진정 자기 자신이 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내 헌신은 내 욕심과 같은 단어였다. 나를 위한 희생이고, 내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을 사랑으로 불렀던 것이다.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은 장악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망의 변형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고 실패는 내게 속삭여 주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같은 결말이 내 인생이기를 원했지만, 달콤한 사랑만 아는 사람은 변할 수 없고, 변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다고 말이다.
뜻밖에도 이것을 깨달은 완패한 자리에서, 내가 배워야 했던 것들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지극한 행복을 내게 보여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들고, 자기를 부수고, 마침내 전과는 다른 눈을 뜨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은 결코 달콤함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만 같을 줄 알았던 결혼의 이상이 일상으로 초라하게 변하고, 환상이 환장으로 깨어지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을, 자기 자신을 낱낱이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좋은 것 중의 가장 좋은 것,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사랑'은 어쩌면 클리셰처럼, 혹은 키치처럼 고정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을 말할 때,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사랑의 표면, 그 일부만을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건 아닐까?
돌아보면 사랑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스러웠던 때야말로, 나의 모자람을 직면하게 하고 나를 부수고, 새로 채우는 시간이었다. 사랑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를 보게 하고, 변화시키고, 내 안의 세계가 확장되게 했다. 이렇게 다양한 면을 모두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랑은 이어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소용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하고 마는 그 바보 같은 마음이 간절함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 그때의 나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간절함이라면 나 역시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그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침전물이 켜켜이 쌓여 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침묵은 비겁함 외에 아무것도 아닐거니까.
내 삶을 돌아보며 더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