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

이방인 -알베르 카뮈

by 어제만난사람

인간은 삶에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의미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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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에 일말의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뫼르소. 하지만 마리와 잠자리를 하고도 자기를 사랑하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뫼르소가 '사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를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사람에게 다가가지는 않지만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과 친교 활동을 하고, 그들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 무감해 보이고 냉정해 보이면서도 막 인간으로 환생한 동물과 같은 존재적 순수함이 있다. 자세히 보면 그는 소설 전반에서 단 한 번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교활하게 감정을 꾸며댄 적이 없다.



부모와 큰 정서적 교류 없이 자랐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 탓에 장례식에서도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슬퍼하는 척은 한다. 재판에 불리해질 것 같다면 비록 내가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독실한 신자인 판사 앞에서는 신을 믿는다고 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기감정을 속이는 일은 매우 흔한 인간적인 반응인데, 뫼르소에게는 그러한 꼼수가 없다. 혹자는 그에게 감정 자체가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거나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타인의 곤란한 처지를 도와주는 마음도 가지고 있고, 상심에 공감은 못해도 상심한 사람을 위로할 줄도 안다.


프랑스인인 그가 점령국인 알제리의 아랍인을 죽인 것은 당시 시대상 무죄 방면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다음날 여자 친구와 잠자리를 하고, 불량스러운 이웃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는 데다, 재판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에 이 살인은 우연과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악의를 품고 저지른 짓으로 여겨져 사형 선고를 받는다.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이 타인을 해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닌 경우라 해도, 그 시대나 문화가 이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런 행위를 불쾌하고 이질적으로 느끼게 사회화된다.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통곡해야 하는 문화에서 슬퍼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방귀를 뀌는 것을 불쾌해하는 문화에서 매번 큰 소리로 방귀를 뀌어대는 사람에 대한 인식,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듬어 주어야 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아이의 양육을 포기한 사람에 대한 인식처럼, 특정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함'에 벗어나는 행위나 표현들은 문화적 편견, 혹은 인류적 편견의 굴레를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각각의 상황에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하거나 적당한 가면을 쓰고 행동하곤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혐오감을 주거나 공포감을 느끼게 하거나 하는 식으로 결국 그 사회에서 배척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에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카뮈의 생각은, 뫼르소를 통해서 드러난다.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음으로써 삶의 의미 없음을 수용하며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성취하기가 만만찮은 일이 된다. 뫼르소처럼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도 살아남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위선으로 살지 않으며 삶을 끌어안으려 해도 사회가, 타자가 규정해 두고 지키거나 추구하도록 만든 의미들이 너무 많이 뿌려져 있다. 그의 죄는 인류와 타협하지 않는 그 순간 사형으로 귀결되고 만다. 결국 타자가 존재하는 한, 개인이 자기의 실존을 온전하게 깨닫고 만족하면서 살기란 이상일뿐, 실천적인 철학으로 남을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만약 이방인에서와 같이 배척하는 타자가 없고, 사회가 없다면 개인의 실존이 가능할까? 아이러니하지만 타자 없이 존재하는 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인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라고 하는 존재를 점점 더 또렷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실존은 부처쯤 되지 않고서야 닿을 수 없는 꿈, 이상적인 공산주의의 근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철학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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