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달타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는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잘생긴 청년으로 자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에 대한 열망 때문에 사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서 명상과 금식, 인내, 고행을 통해 수련에 정진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싯다르타는 자신이 완성에 이르지는 못함을 느끼고 더욱 노력한다.
제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부처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동명이인인 싯다르타라는 가상의 인물이 주인공이다. 소설 속에서 부처는 고타마라고 칭해지며 이미 완성에 이른 인물로 등장한다. 친구 고빈다는 부처의 가르침에 감명하여 그를 따르기로 하나, 싯다르타는 부처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이란 자기만의 길을 통해서 이뤄짐을 간파한다.
그는 혼자만의 길을 떠나고, 여기에서 싯타르타의 자아가 한 번 깨어진다. 이후 속세에서의 삶을 경험한 뒤 그 자아도 깨어지며 더 깊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싯다르타도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아들의 등장으로 인해 크게 흔들리는데,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사랑과 집착은 그에게 엄청난 괴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를 처음 읽었던 15년쯤 전, 내가 이해했던 이 책의 이야기는 구도자인 싯다르타가 자기의 길을 걸어 해탈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년 뒤, 내 아이가 사춘기로 힘들어하던 시절에 《싯다르타》가 떠올랐을 때는 자식에 대한 애절한 마음은 해탈의 마지막 관문이 될 만큼이나 강렬한 집착이 맞겠다는 거였다.
그 마음이야 말로 내 욕심이라는 걸 깨닫고 놓을 수 있어야 하지만, 부모가 흔히 자식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할 때는 '내 뜻대로 안 되는 너 같은 자식은 필요 없다', '내 말도 안 듣고 니 멋대로 살아봐라. 고생하고 나면 그제야 내 말을 알겠지.'라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한 포기이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식이 불행과 비참으로 가득한 길을 걷는 걸 보고 멈춘다는 것은 그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였으며, 한 순간도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아들을 존중하였다.
사춘기의 아이앞에서 나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깨달음을 자주 떠올렸다.
걱정과 불안이 순간순간 올라오거나 아이가 편한 길을 갔으면 하고 바랄 때, 내가 대신 고통받고 너는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내려놓아야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봐 주어야지.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려주는 것이다.' 하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고 다시 이 책을 읽은 오늘, 나는 책의 내용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태 싯다르타의 아들은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결국 집을 뛰쳐나가 탕아로 불행하게 삶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자기의 업을 짊어지고, 스스로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뛰쳐나갔던 것뿐이었다. 마치 싯다르타 자신이 브라만의 자리와 보장된 미래도 박차고 아버지를 떠났던 것처럼.
그러니까 사랑하고 지켜보는 것조차도 그저 내 욕심의 찌꺼기였을지도 모른다. 생은 살아감으로써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무수히 가르쳐주는데, 내가 뭐라고 그걸 기다려주고 지켜보고 한다는 말인가. 내가 경험하는 것이 나를 변화시켜 주듯이, 내 아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그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자 하는 이는 모르는 것을 꺼리듯, 즐기는 마음은 괴로움을 피하려 하게 되고, 그 순간 즐김은 집착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흔히 돈오라는 말을 하지만, 대부분의 깨달음은 삶을 통해 조금씩 스며들 듯 다가온다. 누리고, 고통받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이 흘러가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것은 삶을 뒤흔드는 폭풍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처럼 서서히 찾아와, 부분에서 전체로 번져나간다. 그래서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이미 유연해졌지만, 또 다른 부분은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하다.
좋은 책은 이런 통찰의 시간을 마련해 주며, 책 속 인물을 통해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동양 사상에 매료되었던 헤세의 철학이 녹아 있는 《싯다르타》는, 사유의 여유를 줄 뿐 아니라 같은 독자라도 각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책이 아닌가 싶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육체를 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단식이나 호흡조절은 또한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부터의 도피이다. 그것은 자아의 번뇌로부터 순간적으로 이탈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생의 무상과 번뇌를 잊으려는 일시적인 마취에 지나지 않는다. 술집에서 몇 잔의 술을 마시는 소몰이꾼들도 터득할 수 있다. 그런 순간에는 그도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다.-31
그의 목표가 그를 끌어당기고 있소. 왜냐하면 그는 목표에 위배되는 일은 어떠한 것도 마음속으로 들여놓지 않기 때문이오. 싯다르타가 사문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그것이오. -84
카마스바미가 불쾌해하거나 모욕을 받아 화를 내거나 장사일로 시달림을 겪을 때면, 싯달타는 항상 경멸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몇 번의 장마 기와 수확기가 지나가는 동안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조소도 점점 무디어졌고, 그의 우월감도 잠들어 갔다. 점점 축척되어 가는 부 속에 묻혀서 서서히 싯다르타 자신이 소인배의 요소를, 철부지 같은 소심한 요소를 지니기에 이른 것이었다. -101
'필연적으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스스로 맛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속적인 쾌락과 부유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어린애일 적부터 배웠다. 그것을 안 것은 오래되었지만 체험한 것은 바로 최근의 일이다. 이제는 그것을 잘 안다. 오로지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나의 심장으로, 나의 위장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126
그는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싯다르타 역시 늙을 것이고 언젠가는 죽어야 할 것이다. 싯다르타는 무상한 존재였다. 무릇 모든 형상은 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젊고 어린애이며, 새로운 싯다르타이고,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128
참으로 도를 찾아내고자 하는 구도자라면 아무런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일단 찾은 자는 어떠한 가르침, 어떠한 길, 어떠한 목표라도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자는 영원 속에 살고 있고 신성을 호흡하는 다른 수천의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다. 142
오, 그렇습니다. 그 아이도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영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그 아이가 어떠한 길로, 어떤 행위로, 어떤 번뇌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지 대체 알기나 할까요? 그 애의 번뇌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그 애의 마음은 오만하고 강합니다. 그런 아이는 많은 번뇌를 겪고, 많은 오류를 범하고, 많은 그릇됨을 행하고, 많은 죄를 짓 게 마련이지요. 말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은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는 거요? 아들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오? 아들을 벌주는 건 아니오? 152
누가 사문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구해주었던가요? 부친의 깊은 신앙심이, 스승의 훈계가, 자기의 지식이, 탐구심이 과연 그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스스로 삶을 살고, 스스로 죄악을 짊어지고, 스스로 쓰디쓴 잔을 마시고,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는데 어떤 아버지, 어떤 스승이 그를 감싸 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은 그 누군들 이 길을 걷지 않고 살아갈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친구여, 혹 당신의 어린 아들만은 당신이 그 애의 번민과 아픔과 실망을 덜어주고 싶다고 해서 그런 도정에서 면제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비록 당신이 그 애를 위해 열 번씩 죽는다 한들, 그것으로 당신이 그 애의 운명을 손톱만치라도 덜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수데바가 말한 것들은 싯다르타 자신도 이미 생각하고 깨달았던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그가 실천할 수 없는 단순한 지식에 불과하였다. 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 지식보다 강하였고, 자식을 잃는다는 데 대한 그의 애착과 불안은 그 지식보다 강한 것이었다.
일찍이 그가 그토록 맹목적으로, 고통스럽게, 그토록 보람 없이, 그러면서도 그토록 행복한 마음으로 그 누구를 사랑한 적이 또 있었던가? 155
지식은 전달할 수 있어도 지혜는 그럴 수가 없네.
그 때문에 나는 어떤 스승도 따르지 못했다네.
모든 진리는 그것이 단면적일 때에만 표현될 수 있고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네. 사색할 수 있고, 언어로 표현될 수 있고,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은 단면적인 것이요, 반쪽이요, 전체가 못 되고 원이 못 되고 단일의 것이 못 되네. 그러니까 고타마께서 세계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에, 세계를 윤회와 열반, 의혹과 진실, 번뇌와 해탈로 나눌 수밖에 없었던 걸세. 가르치고자 하려면 다른 방도가 없네. 그렇지만 세계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지.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