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이 책은 반드시 두 번, 아니 세 번은 읽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예민하고 냉소적인 베로니카와 주인공 토니(앤서니 웹스터)가 이별한 뒤 주인공이 보였던 행동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친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되겠느냐"는 편지를 토니에게 보냈을 때도, 토니 입장에서는 화를 낼 만하지 않은가 싶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가 딸의 남자친구에게 추파를 던지는 듯한 모습은 실로 기이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암시와 복선이 깔려 있는 이 작품은 끝끝내 진실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차가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토니를 사랑했을 수도 있고, 그의 가족 역시 토니를 무시했다기보다는 토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사라 역시 딸의 애인을 빼앗으려 했다기보다, 허세 가득한 남편과 까칠한 딸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읽기에서 새롭게 드러난 미묘한 사실들, 역사 수업에서의 질문, 롭슨의 자살, 강의 역류, 베로니카의 춤, 사라의 유언 등은, 처음 읽을 때는 전혀 주목하지 못했던 장면들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장면들조차, 다시 읽으니 모두 의미심장한 복선을 품고 있었다.
예컨대 토니는 늘 "베로니카에게 무시당하다가 헤어졌다"라고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집에도 초대받았고, 가족들과 며칠이나 머물렀으며, 강의 역류를 함께 지켜본 저녁에도 나란히 있었다.
이는 곧 토니의 기억이 감정적으로 불편한 순간들을 삭제하거나 왜곡했음을 드러낸다. 기억이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핵심을 지워버리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단순히 조롱하기 위해 자기 집에 며칠씩 묵게하는 여자는 없다.
토니는 "헤어지고 나서야 베로니카와 잘 수 있었다"라고 기억하지만, 정작 베로니카는 "잠자리를 가진 뒤 그는 떠났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그는 케이크 깡통 뚜껑을 닫으며 이별을 예감했지만, 실제 관계가 끝난 것은 섹스 이후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토니 스스로도 말하듯 자기 보존을 위해 스스로를 '나쁜 놈'으로 기억할만한 사건들을 지우거나 왜곡하면서 말이다.
베로니카가 토니의 방에서 춤을 추는 장면도 첫 독서 때는 성질 나쁜 여자친구의 기괴한 행동으로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의외로 평범한 여대생이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항상 까칠하고 냉소적인 여자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춤을 남자친구 앞에서 추는 행위는, 이후 토니의 행동에 따라서 두 사람이 더 친밀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 토니는 그녀를 영리하고 도도한 상류층 여대생이라고 여기며 주눅 들어 있었으므로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멈칫거렸다. 베로니카는 그런 토니를 사랑하면서도 답답해했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전 모임에서 만났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의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집안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과 정계 인사들로 가득한, 확실히 다른 급의 배경을 가진 집안이었다. 그녀는 거들먹거린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카톡 프로필로 쟁쟁한 가족사진을 올려두었다. 사람들이 물어보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었는데 이후부터 나는 호감 대신 거리감을 느꼈다. 우리 집안에도 정치인이나 대기업 임원을 지낸 사람이 있었지만,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딱히 득을 본 적도 없고 그 사실이 나를 상류층 아가씨로 느끼게 한 적도 없었다. 차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이질감. 이 경험 덕분에, 토니가 베로니카를 늘 다른 계층의 사람처럼 느꼈다는 부분이 약간은 이해가 간다.
실제로 1960년대 영국 사회에서 계층과 대학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토니가 다닌 브리스톨은 상위권 대학이긴 했지만, 옥스퍼드나 캠브리지가 sky라면 브리스톨은 그보다는 좀 낮은 대학이라고. 한국 사회에서도 학벌이나 집안 배경에 따른 미묘한 차별과 거리감이 존재하듯, 토니가 늘 열등감을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에이드리언이 항상 자기를 주눅 들게 만들던 베로니카와 이어진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서 지워진 토니의 편지가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의 어머니를 찾아가게 만들었다고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과연 토니의 책임인가. 분명 어느 정도의 축척된 몫은 있겠지만, 에이드리언도, 베로니카도 토니에게 따져 물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쌀쌀맞게 굴면서도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마음속으로는 '너만 아니었어도'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마 그것은 에이드리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에이드리언이 쓴 일기장의 기묘한 공식에는 앤서니의 a가 들어가 있고, '만약에 토니가-'라고 가정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2부 후반부로 가면 소설은 토니가 오해해 왔던 진실을 서서히 드러낸다. 에이드리언의 유서는 삶에 대한 고찰 후 자살을 선택한 지식인의 증거로 해석되어 왔지만, 일기장과 편지를 통해 드러난 죽음의 진실은 롭슨의 자살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죽음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동기였고, 그는 죽음 앞에서도 그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롭슨조차도 '엄마 미안해'라고 썼던 유서를, 에이드리언은 끝까지 쓰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또 다른 주제를 드러낸다. 바로 지성의 한계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졌다 해도, 복잡한 인간관계와 도덕적 갈등을 온전히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들이 고교 시절 나눈 심오한 철학적 대화는 '이혼 가정에서 아빠와 자라서 엄마의 빈자리가 큰 똑똑한 청년'이 여자친구의 어머니에게 빠져드는 것에 아무런 방어막이 되지 못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토니의 입장에서 소설의 가장 거대한 주제는 ‘기억과 혼란’이다. 토니의 기억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가 예감했던 것, 예측했던 것들은 모두 틀렸다.
'축척과 책임 너머 혼란이 있을 뿐이다. 거대한 혼란이.'
'진정한 무지가 갖는 독창성조차 결여된 타입의 천치'라고 주인공이 묘사했던 마셜의 대사가 다시 등장하며 소설은 끝난다. 자신의 무지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마셜이나 토니나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런 토니와 우리도 다르지 않다. 이 혼란은 불완전한 기억과 자만심을 가진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줄리언 반스는 말하고 싶은 듯 하다. 확실한 줄 알았던 나의 세계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고.
* 한국판 제목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반어적 의미일 수도 있지만, 주인공의 예감이 원체 맞는 게 없다 보니, 원제인 The Sense of an Ending에 비하면 작품의 주제와는 다소 어긋난다는 느낌이 든다.
영어 원 제목은 끝의 의미, 종말의 느낌, 인생의 말미에서의 해석 등등 주인공의 상황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를 동시에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셜은 신중한 성격의 천치이되, 진정한 무지가 갖는 독창성조차 결여된 타입이기 때문이다. 마셜은 선생의 질문 속에 숨어 있을 만한 복잡한 의미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답을 정했다.
"혼란이 있었습니다." 14
무슨 근거로 베로니카가 처녀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그녀가 나랑 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무슨 논리가 존재한단 말인가. 49
"밤에는 저기 오줌을 싸도 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끼리 허물없이 지내보자는 뜻인지, 아니면 날 하류층 인간쓰레기로 보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51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을 땐 포드 부인뿐이었다. 베로니카가 가족들에게 내가 늦잠을 자고 싶어 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는 거였다.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 54
헨리 8세를 비롯한 기타 등등의 역사에서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80 (하지만 정신 상태는 내 거나 알 수 있지, 타인 건 추측할 뿐인걸...)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 101
앞을 내다보고, 그러고 나서 그 미래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105
기억이란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 또는 시간은 정착제가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 111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141
'예술이 과장하는 삶의 보잘것없음'에 대해 이야기한 게 누구였나. 이십 대 막바지의 어느 순간, 나는 나의 모험심이 졸아들어버린 지 오래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소년기에 꿈꾼 것 중 단 하나라도 실행에 옮길 날은 오지 않을 거였다. 대신, 나는 잔디를 깎았고, 휴가를 냈고, 나름대로 인생을 즐겼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162
인생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좀 더 늦게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180
혹자는 역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모든 것이 붕괴할 때로, 이는 곧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할 때 과연 타당한 데가 있을까? 183
시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마흔은 아무것도 아니야. 쉰 살은 돼야 인생의 절정을 맛보는 거지, 예순은 새로운 마흔이야...... 시간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 그리고 주관적인 시간도 있다. 가령, 손목의 요골동맥 바로 옆에 시계의 앞면이 오도록 차는 경우. 이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며, 기억과 맺는 관계 속에서 측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기묘한 일이 일어났을 때 -새로운 기억이 느닷없이 나를 엄습했을 때 - 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마치 강물이 역류한 것 같았다. 210
(그의 역사는 패배자의 자기기만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