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투안의 무덤 - 어슐러 K. 르귄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 2 편
주인공 테나르는 신성한 전생의 기억을 잇는 자, 아투안의 무덤을 지키는 여사제 '먹힌자 - 아르하' 로 운명지어져, 부모와 헤어지고 5살때 신전으로 온다. 그러나 그녀는 선택한 적 없고, 기억도 없다. 남자는 들어올 수 없는 고요하고 죽은 것들로 가득한 무덤의 땅. 이 땅에 게드라는 낯선 존재가 들어오면서, 테나르의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전혀 다른 언어, 다른 세계관, 그리고 다른 ‘이름의 질서’를 그녀 앞에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게드가 아니라 테나르가 있다. 그녀는 처음으로 선택 앞에 선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믿을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테나르의 이야기를 읽으며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를 떠올렸다. 그 역시 ‘전생의 기억을 지닌 자’라는 역할을 강요받고, 일생을 수행자이자 지도자로 살아야 했던 인물이다. 외면적으로는 신성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철저히 각본이 정해진 역할극 속에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달라이 라마'다. 신화를 사회 제도에 고정시키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신화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억압의 구조물로 변질되고 만다. 결국 티벳의 전생과 윤회의 신화는 지켜졌지만, 정치적 주권과 미래의 자유는 침식당하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닌가.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더 이상 환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발언이 아니라, 자신이 연기해야만 했던 신화적 역할을 끊어내는 자각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테나르도 처음에는 달라이 라마와 같은 인물이었다. '아르하'라는 신화 속 역할을 연기하던 그녀는, 신왕의 반역자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잔혹한 사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게드가 무덤에 들어온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더이상 그러한 선택을 거부하며 어둠 속 무덤을 벗어나 '테나르'라는 진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신화는 본래 인간의 삶을 설명하고 위로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도로 굳어지고, 삶을 명령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점차 이야기 속 유령이 된다. 과거의 인류는 신화를 직접 살아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 신화는 개인의 내면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은 뒤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을 현실에 드러내게 되면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관계없이 신화적 지위에 종속되는 인간과 그것을 추종하는 인간이 나타나고, 그들은 역할극에 충실해져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할 것들을 외부에 있다고 믿는다. 신성도, 악도, 심지어 삶 조차도 외부에 있다고 착각하고, 끝없는 분열속에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테나르가 무덤을 떠나는 장면은, 그 신화를 해체하는 순간이며 동시에 새로운 서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아투안의 무덤』(1971)은 우리가 가진 모든 이름 ― 가족, 전통, 역할, 신념 ― 이 과연 진짜 우리를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낡은 신화를 입은 껍데기인지 자문하게 한다.
- 도입부는 꽤 지루하나 무덤의 묘사가 끝나고 아르하가 무녀로서 집권한 뒤로는 금방 다 읽어짐.
"제가 신왕에 대해 대단한 경외심 같은 걸 느낄 수 있겠어요? 뭐가 어찌 됐든 그분도 그냥 사람인걸요. 딴 사람들이랑 똑같이 발톱을 깎는다는 데 내기라도 걸겠어요. 그분이 신이기도 하시다는 거야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요, 돌아가신 다음이 되면 훨씬 신성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아르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펜드의 말 아래 깔려 있는 어떤 것에는 동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낯선 무엇으로서 그녀를 두렵게 했다.
아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며 인생을 얼마나 다르게 바라보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지내 왔다. 아르하는 펜드의 멀쩡한 불신에 두려움을 느꼈다. -64
무녀들은 침착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삶이란 은연중 시기심과 비참함과 보잘것없는 야심과 헛되이 스러져 간 욕망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아르하는 줄곧 이런 여자들 틈에서 살아와 그녀가 아는 인간의 세상은 오로지 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이 무리들이 딱하고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125
그들은 무엇을 만들어 낼 힘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의 힘이란 온통 어둡게 하고 파괴하는 힘뿐이오. 그들은 이 장소를 떠날 수가 없소. 그들은 이 장소 자체이며 이곳은 진정 그들의 것이지요. 그들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려선 안 되지만 숭배해서도 안 된다오.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숭배하고 그 앞에서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긴다면 바로 거기에서 악이 자라난다오. 그렇게 세상에는 어둠이 결집되는 장소들이 만들어지지요.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