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 미야모토 테루
봄밤의 꿈처럼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 죽음과 삶을 둘러싼 화자의 감정이 고요하게 출렁인다. 네 편의 단편 모두 죽음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엮여 있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인가를 남긴다.
개인적으로는 첫 작품인 『환상의 빛』 이 가장 좋았다.
갓난아기를 둔 여주인공은 남편이 퇴근길에 갑작스럽게 철로 위를 걷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유도, 유서도 없는 죽음.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묵묵히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재혼 후 정착한 소소기의 마을, 그 바다를 바라보며 기억을 끌어올린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그녀는 소소기의 바다가 잔잔한 날의 환상적인 빛을 묘사한다. 시아버지는 그 빛을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고 하는데, 소설 말미에서는 그녀 또한 잔물결의 빛이 유혹하는 그곳은 심해의 입구라 생각하게 된다. 전 남편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끝없이 묻고 또 물었던 그녀의 답은, 환상의 빛을 쫒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주어진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데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나 궁리를 한 것도 아닌데 다미오 씨와 도모코는 이제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도 유이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키구치 집안 사람이 다 된 것입니다."
일상의 풍경 속에 자기의 비극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던 화자의 나직한 독백들은,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주는 삶 그 자체의 조용한 치유의 힘을 깨우치게 한다. 괜찮아 질 거라는 공허한 위로의 말보다 더 큰 위안이 되는 것은, '말없이 자기의 곁을 내어주는 존재'인 건 아닐까.
두 번째 단편 『밤 벚꽃』의 아야코는 장성한 아들을 사고로 잃은지 1년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의 사망으로, 20년 전 이혼했던 남편과 다시 마주한다. 가난한 신혼부부가 아들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젊은 시절 “아내였지만 여자로 살지 않았던” 자신을 떠올렸렸다.
“대체 뭐가 이것인지 아야코로서도 분명히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녀는 지금이라면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는 방법을, 오늘이 마지막인 꽃 안에서 일순 본 것인데, 그 아련한 기색은 밤 벚꽃에서 눈을 떼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이미 지나갔고, 아야코의 꽃망울 같은 그 마음은 밤 벚꽃 배경에서 잠시 빛났다 사라져, 쓸쓸함이 깃든 회한만 고요히 남는다.
『박쥐』의 주인공은 고교 친구의 죽음을 우연히 만난 동창으로부터 듣게 된다.
한 소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했으나 소녀를 만나 곧 돌아오겠다던 친구는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날부터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박쥐 떼가 날아오르던 그 날 황혼의 하늘과 함께 친구는 사라졌고, 주인공은 내연녀의 눈빛과 과거거 친구가 만났던 소녀가 어딘가 닮았다고 느낀다.
그는 내연녀와 함께 교토 시센도 정원을 찾았는데, 그녀가 관람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고 박쥐떼가 하늘 위를 날아다니자 그 날의 감정, 그 날의 풍경을 다시 떠올린다. 죽음과 비슷한 불안과 예감,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림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마지막 단편 『침대차』
출장 길 같은 같에 탄 노인의 흐느낌과 기차 침대칸의 삐걱거림은 어린 시절 조부와 함께 살던 옛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단편집은 뒤로 갈수록 감정의 밀도는 점차 희미해지는 것 같다. 어쩌면 환상의 빛이 워낙 섬세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뒤따르는 이야기들은 그 그림자 아래 놓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야모토 테루의 문장은 술술 읽히고 독자를 긴장시키지 않는다.
죽음을 소재로 삼지만, 결코 죽음을 선명히 그리지 않았다. 누구의 죽음이건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상실의 충격은 살아남은 이(가족, 혹은 오래 연락이 끊어진 친구) 자신의 삶, 자기 자신을 대면하도록 한다.
그 순간을 작가는 상황과 감정의 절제된 묘사로 부드럽게 표현하여, 비통하지 않은 깨끗한 슬픔, 정제된 회한으로 빚어낸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 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대체 사람의 어떤 마음을 속이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러고 보면 저도 어쩌다 그 빛나는 잔물결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10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나 궁리를 한 것도 아닌데 다미오 씨와 도모코는 이제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도 유이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키구치 집안 사람이 다 된 것입니다.
저는 어느덧 꾸벅꾸벅 졸며 따뜻한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십몇 년 전 경찰이 집의 다다미를 들추고 방바닥을 판 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을 때의 그 신기한 안도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80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 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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