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천선란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의 중심에는 휴머노이드 '콜리'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다.
그는 감정을 학습하는 AI 칩이 실수로 장착된 덕분에, 경주마 투데이와의 교감을 통해 “달리는 기쁨”을 배운다. 투데이가 혹사로 인해 심한 통증을 겪는 것을 알게 되면서 콜리는 경기를 포기하고 낙마를 택해 폐기 위기에 처하지만, 로봇에 관심이 많은 소녀 연재가 그를 집으로 데려와 수리하고 콜리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연재는 부잣집 친구 지수, 휠체어를 타는 언니 은혜와 안락사를 앞둔 투데이의 상태를 알게 되고, 투데이를 위한 마지막 경기를 따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가벼운 걷기로 단순히 참가만을 목적으로 했던 대회에서 투데이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콜리는 투데이의 상태를 계산한 뒤 자기가 회생불능이 될 것을 알면서도 낙마하기로 결정한다.
이후의 ‘감동의 대미’는 다소 압축적인 설명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투데이와 콜리의 이야기가 매스컴을 타면서 투데이는 안락사 대신 제주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연재와 지수는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얻으며, 은혜는 도움 없이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새로운 휠체어를 얻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은 부드럽고, 인물들의 감정선도 울림이 있다. 작가의 문체는 간결하고 따뜻해서 초등 고학년 이상의 독자부터 성인까지 읽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특히 감정 중심의 전개가 빠르고 직관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다.
그러나 비판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몇 가지 뚜렷한 한계를 지닌다.
우선 인물 설정이 과도하게 이상적이거나 전형적이다. 빈곤하지만 영리한 소녀, 장애인에 대한 무분별한 동정을 거부하는 언니, 냉정한 척 하지만 따뜻한 친구, 생명을 지키는 기계 등은 너무 명확한 역할에 갇혀 있다. 등장인물의 선택이 각자의 개성과 개연성을 지니기보다는 감동을 위한 장치로만 쓰인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도 있다.
이전까지 오직 입시와 성적을 위해 살았고, 수상을 위해 연재와 대회를 같이 나가겠다던 차갑고 영리한 부잣집 소녀가, 연재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헌신적인 '연재바라기'로 급변하는 모습은 다소 의아하다. 이처럼 친화력과 의리가 넘치는 아이가 그동안 딱히 친구도 없이 오직 공부와 입시에만 매진했다는 설정은 캐릭터의 일관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기자인 사촌 오빠가 몇 달간의 잠입취재 결과물(경마장 부정 베팅의 진실)을, 말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협박용으로 써 버리는 장면은 동물 인권에 대한 도덕적인 결정이라기보다 줄거리 진행을 억지로 기능시키기 위한 서사 장치로 보이며, 그만큼 현실성이 떨어진다. 투데이의 목숨을 2주 연장하는 것과, 조작된 판 위에서 지속적으로 혹사당하는 수많은 경주마의 환경을 개선할 수도 있는 기사 보도 사이에서 윤리적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일단 제외하고 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몇 달을 방송국 팀으로 잠입취재까지 하며 겨우 얻은 특종을 10대 사촌 동생들이 좋아하는 말을 살리는데 써 달라고 한다고 해서 들어줄 사촌 오빠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고, 함께 조사했던 팀이 타격을 받을 수 있는 결정이다.
『천 개의 파랑』은 감동을 위해 많은 걸 덜어내서 갈등은 짧고 해결은 빠르며, 딜레마는 감정적 공감으로 봉합된다. 이는 대중성 있는 이야기로서 장점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충분히 연극. 영화 등으로 인기를 구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과 기계, 인간이 만들어내는 교감의 물결은 천 개의 파랑이 되어 빛날 수도 있지만, 작가가 이를 감동의 파랑으로만 칠하지 말고, 감춰진 균열의 다채로운 색을 더 용기 있게 그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감동과 치유의 이야기 속에서도, 문학은 질문을 던지는 힘을 잃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