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없는 자들의 나라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위화

by 어제만난사람







책을 읽다 보면 순식간에 줄거리에 빨려들 정도로 글을 정말 재미있게 쓰는 작가가 있고, 문장이 유려한 작가도 있다. 일단 재미가 있어야 읽을 수 있다. 다음 줄거리가 궁금하거나, 다음 문장이 궁금해야 다음 페이지로 넘기게 된다.

헌데 날 때부터 작가로 운명 지어진 것 같다 싶을 정도인 작가 작품은, 재미있고 없고는 그다음 문제다. 심지어 개인적인 취향이 불호일지라도, 그런 작가의 작품은 읽다 보면 작품이 주는 무게감을 그대로 느끼면서 감탄하게 된다.


위화의 소설도 내 취향이 아니다. 한강의 검은 사슴을 25년쯤 전에 처음 (힘들게) 읽었을 때,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니!' 감탄하고, 며칠 그 우울 속에서 허우적 대고 나서 '이 작가 소설은 힘드네'라고 했는데, 딱 그런 느낌이다.

너무 잘 썼고, 너무 불편해. 재미있고 술술 읽히는데 읽고 나면 찝찝해.


읽을 때는 쉬운데 읽고 나서가 어렵다. 내 안에 뭐가 막 들들 끓으면서 말을 걸기 시작하는데, 그게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사그라들지를 않고 저희끼리 와글와글 거리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나 헤르만 헤세는 그래도 다정함이나 몽글몽글함이 있지. 서머셋 몸이나 오르한 파묵은 진중함 속에 흥미진진함도 있고. 하지만 위화의 소설은 웃기고, 금방 읽을 수도 있는데, 그 웃음이 시종일관 불편한 웃음이다. 사실 다음 페이지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만두고 싶은데, 왠지 그만두면 안 될 것만 같아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읽고 나서 오히려 더 많이 생각나고 답할 수 없는 질문도 계속 떠올랐다.

바보들의 이야기거나 답답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우화 속에 칼날이 숨겨져 있는 듯 하다. 개인의 어리석음이나 도덕성에 관한 우화같지만 실은 입이 없는 백성의 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비판일지도 모른다.


위화는 공산주의 중국에서 산다. 그는 소설 속에서 절대 체제를 욕하지 않는다. 당을 비판하지 않는다. 혁명을 조롱하지 않는다. 이야기들은 그저 한 사람, 한 존재, 한 개의 죽음,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눈동자를 남긴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멍청하고 웃기고 슬픈 인물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게 괜찮다고 생각하냐고.”


인문학의 존재 의미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회의 인문학의 수준이 바로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가장 탁월한 문학은 그 사회의 가장 불편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고, 벼리고 벼려서 독자를 깨운다. 드글드글 와글와글.


많은 독자가 그러한 작품을 읽는 나라의 미래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고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편함을 모호하게만 드러낼 수밖에 없는 비운의 작가가 사는 곳은, 공포 정치나 독재외에는 체제를 유지할 답이 사실상 딱히 없는 곳일 게다. 그곳에는 고여서 썩은 것이 순환할 수 있는 물길이 없고, 영혼이 자기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가 없다. 정당한 이가 대접받기 어렵고, 다정한 이가 살아남을 수 없으며, 부드러운 마음은 짓밟히고 마는 땅. 개개인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체제가 그들의 본성을 한쪽 벽에 몰아세우고 있는 곳. 악이 자멸하기 전까지 선조차도 썩어가며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는다.

그들의 괴로움과 슬픔은 장작이 쌓이듯, 계속해서 쌓여 언젠가 터질 일만 남게 되지 않을까. 아니, 그런 괴로움을 인지조차 못하도록 민중을 우매하게 사육하면 지배자들만큼은 편안한 나라로 남으려나.

당신들은 눈을 뜰 수 있을까.

우리는 눈을 뜨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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