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38세에 죽을 예정입니다만 - 샬럿 버터필드
"내가 알기에 사랑이란 누군가를 계속 생각하고, 자신에게서 그 사람의 체취가 계속 나길 바라고, 그 사람이 웃길 바라고, 그 사람이 옆에 앉으면 손을 뻗어 계속 턱을 쓰다듬게 되고......"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난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아. 난 사랑이란 상대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모습과 두려움과 불안함을 보여주고 상대가 그 점을 악용하지 않길 바라는 거라고 생각했어." 264
"내게 양보와 타협이란 내 인생에 다른 사람의 인생이 스며들 공간을 내주고 나도 그 사람의 인생에 들어가는 거야. 두 사람의 인생을 절반으로 자른 다음 서로 연결해서 최선이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305
넬은 병원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은 나이가 들어 지팡이나 보행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혼자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저들 중 몇 사람이나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을까? 후회란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갖지 못한 기회에 대한 것일까? 323
넬 그레이엄은 친구들과 여행 중 재미로 본 점쟁이가 말한 '사망 예정일'에 한 친구가 정말 사고로 죽자, 38세에 죽는다는 자기의 사망일도 맞을 거라 완전히 믿고는 그전까지 세계 여행을 실컷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맘껏 하며 살았다. 38세의 그날이 다가오자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sns 계정도 없애고, 휴대폰까지 팔아 버리고 호텔 스위트룸에서 죽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멀쩡히 눈을 뜬다.
막상 살아남은 넬은 충격과 당혹에 빠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미래의 죽음을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이 원했던 것, 가고 싶었던 곳을 다니며 충실하게 삶을 만끽했음을 느낀다. 반면, 이른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누구와도 깊고 지속되는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로 산다. 자기가 죽을 날짜를 모르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미래를 대비하고 노후를 준비하며 스스로를 틀 속에 밀어 넣지만, 그렇기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관계를 확장시킨다. 늙어갈수록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연연했던 것을 후회한다.
어느 쪽이 옳다거나 더 낫다고 하긴 어렵지만, 작가는 한쪽으로 치우친 것들의 균형점을 찾는 게 가장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에 몰두하고 삶을 즐기지 못했던 그렉은 방콕으로 떠나고, 깊은 관계를 두려워했던 넬은 다시 고향에 돌아와 가족뿐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자기 삶도 매우 잘 개척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줄거리만 보면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유행했던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주인공인 넬의 성격이 꽤 매력적이었는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많이 닮았다. 타인에게 경계가 거의 없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공격성이 없는 유머를 곧잘 날리면서, 눈물도 많고 공감도 잘하고, 마음이 정말 따뜻한. 이런 사람을 누가 싫어할 수 있겠냔 말이지.
그렉과 톰 사이에서 분명히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음에도, 잡음 없이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해법을 도출해 내는 것도 그녀의 능력이다. 아니면 오직 주인공을 위한 세계를 정성 들여 만든 작가 덕분이거나.
초기 설정은 개연성 파괴 수준이라 (누가 점쟁이 말만 믿고 자기 인생을... 19살이면 몰라도 25살쯤엔 아니어야 하지 않나) 솔직히 설겅설겅 읽다가, 문득 우리가 정말 죽을 날을 안다면 어떻게 살 건지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언제 죽을지 안다면 그전에 넬처럼 더 충실하게 계획도 세우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투자도 죽을 날에 맞춰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해. 백세까지 산다면 엄청 모아야 될 노후 자금도, 예순쯤 죽는다는 걸 알게 되면 맘 편하게 쓰면서 살 수 있잖아? 나는 예순에, 남편은 일흔여덟에 죽는다면, 환갑쯤부터 나 없을 때 만나서 놀 예쁜 할머니를 한 번 찾아보라고 권유할 수도 있고. 마흔이 넘으면 자기의 죽는 날을 알려주는 기계 같은 게 있음 정말 좋겠다. 젊어서 죽는 건 비극이니 모르는 게 낫지만, 마흔 넘어서는 외려 대비하기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