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각 Sep 20. 2022

바깥 독서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

  밖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이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은 십여년 전 대학생 때 깨달았다. 수업과 수업 시간 사이에 1시간 정도가 남아서, 그 시간에 늘 인문대 옆 오래된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늘 조용했고 나뭇잎의 색이 변하는 것,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 낮았던 하늘이 높아지는 것을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바깥 독서 생활이 시작된 것 같다.


 특히 좋아하는 것은 햇빛이 쨍한 날 나뭇잎 그림자와 빛망울이 책 위에 일렁이는 것이다. 글자 위에 춤추는 빛망울을 보고 있으면 그 순간엔 햇빛과 바람과 책과 나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앞을 지나가도, 목소리가 들려도 어쩐지 멀리서 들리는 소리같고, 내 정신은 온전히 문장을 느끼고, 책장을 넘길 때의 촉감을 느끼는 데에만 머무는 것 같다.


  어제는 밴쿠버에도 가을이 선뜻 왔는지 하늘이 무척이나 파랗고 높았다. 바람은 선선하고, 나뭇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알아채는 날에는 피크닉매트와 도시락, 커피와 책을 챙겨 나가야만 한다. 계절이 변하는 찰나를 어렴풋이 느끼면 바깥 독서를 하는 오랜 습관. 그렇게 밖에서 책을 읽고 나면 지난 계절을 잘 통과해서 새로운 계절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 계절에서의 생활을 잘 갈무리하고 조금쯤 새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올 여름은 살아온 시간 중 제일로 한낮 같았다. 화창한 여름동안 늘 숲속을 걷거나, 호수에 뛰어들거나, 캠핑장에서의 햇빛 아래 앉아있거나, 수영장에 갔다. 햇빛의 힘인지 매일 초록의 나무를 보고 있어서인지 대체로 마음이 들떠 있었다. 자꾸만 밖으로 나가 걷고 싶었다. 그러다 어제 낙옆이 뒹굴기 시작하는 공원에 앉아 가을 무드의 음악을 들으며 몇시간동안 책을 읽고 있으니 어느새 차분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신기한 일이다. 주변은 고요하고 기분은 단정해지고, 잘 읽히지 않던 '삶의 격'이라는 지금의 책이 갑자기 마음에 닿았다. 아, 나의 오랜 습관은 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에서도 힘이 있구나. 나는 이제 가을의 생활로 들어서나보다.


  밴쿠버의 가을을 책과 함께 온전히 누리고싶다. 한국의 가을에는 9월, 10월, 11월까지 주말이면 오전에 책을 읽으러 나갔다. 집 근처 공원엔 새가 많아서, 새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많은 책을 읽었다. 밴쿠버의 9월은 한국에서의 9월보다 좀 더 빠르게 차가워지는 것 같다. 좋아하는 스웨터를 입고 비가 오기 전에 자주 나와 바깥 독서를 하고 싶다. 내게 계절의 기억은 벚꽃이 내리던 날 읽었던 온다리쿠의 책, 단풍 든 풍경을 보며 읽었던 최은영의 문장. 맥주 마시며 읽던 초여름의 장기하의 생각, 그 때 눈앞에 있던 풍경으로 각인된다는 것을 아니까,  두 번 누릴 밴쿠버에서의 가을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자주 나와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