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한낮 같던 100일 간의 여름은 계속되지 않고 끝났다.
밴쿠버에 6월에 도착하여 밤 10시까지 낮인 긴 여름을 보냈다.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이 계절의 좋은 점을 구석 구석 누릴 수 있는 100일이었다. 짧은 옷을 입고 하이킹을 하고, 캠핑을 하고, 수영을 했다. 다이어리를 펼치면 거의 매일이 특별했다. 학교를 다녀오는 날에도 저녁 먹고도 밝으니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 나가 일몰을 보고 달리기를 했다.
이런 시간들이 지나고 4시 반이면 밤이 오는 겨울을 지내며 자꾸만 무료함을 느끼며 심심하다고 말하는 나. 자꾸만 침대에 늘어지는 나. 회사에 다니던 시절엔 겨울을 무척 좋아했고, 아늑한 집에서 책을 많이 읽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술을 마시며 꽤 즐거워 했다. 여름보다 겨울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런 내가 낯선 곳에 와서 인생에 제일로 한낮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 좋아하더니, 원래 충족감을 주던 시간들은 지루함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너무도 잘 변한다.
한국에서는 차로 1시간 거리인 근교 도시만 놀러가도 기분 전환이 되고 나들이를 다녀온 것 같았다.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다가 한번씩 새로움을 충전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매일 낯선 곳을 다닌 지 5달이 되니 1시간 거리를 다녀온 것은 그다지 기분 전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국에서도 밖보다 집을 더 좋아하는, 내 기준에서 무척이나 신기한 남편은 겨울이 오고서야 맘편히 혼자인 충분한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자꾸만 심심해하는 아내 때문에 곤란한 것 같다.
내 마음의 무료함, 남편의 곤란함이 몇주 째 부딪히자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쓴다. 나는 외국에 한달살기 하러 온 것이 아니다. 2년 간 공부하러 이곳에 왔다.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은 평일에 도서관과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학생 때 열심히 학기를 보내다 방학이 오면 무척 즐거워 한 이유가 그것이다. 방학동안 여행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또 학기가 시작하면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금밤과 주말에 종종 놀고. 10년 간의 회사 생활동안에도 금요일 밤의 해방감, 침대에서 뒤굴거리는 주말의 달콤함, 여름 휴가를 몇달 전부터 계획하고 그 날만을 기다리며 느끼던 설렘. 그런 일상을 꼼꼼히 디디며 그야말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챙겨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크고 확실한 행복을 더 자주 누리고 있는 지금 어딘가 부족한 것 같고 무료한 내가 웃긴다.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엔, 아 공부를 더 할껄. 대학원에 갈껄. 사람들하고 함께 일하고 싶지가 않다. 제발 혼자 일하고 싶다. 공부는 그냥 혼자하는거니까 나만을 견디면 되는데! 라고 생각하며 버텨 여기까지 왔는데, 마침내 혼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지금 한낮의 자극이 사라지자 지루해 하다니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전에 지드래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수만 명의 팬들로 가득한 콘서트장에서 환호를 받으며 몇 시간 동안 화려한 모습으로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고 나면 숙소로 돌아와 씻고 혼자 컵라면 하나 먹고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잠이 드는 그 간극이 너무 크다고. 그래서 그 공허함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때 저렇게 유명하고 하고 싶은 일로 성공했고, 돈을 많이 벌어도 마음이 만들어내는 공허함이라는 것이 나와 다를 바가 없구나 느꼈었다.
요즘 사람들은 조기 은퇴를 꿈꾼다. 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이른 나이에 은퇴해서 일하지 않고 사는 것. 40대 초엔 은퇴하겠다는 신조어인 파이어족이라는 말도 유행이다. 나도 종종 50살 전에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런데 딱 10년 일하고, 5달을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내며 체력을 다 끌어다써서 놀고 난 지금 생각한다. 일을 하지 않고 매일 매일 놀면 행복할까? 매일 매일 노는 삶이 일상이 되면, 그래도 행복할까?
나중에도 행복하게 잘 살고 싶으면 나는 일단 앞으로 5달간 이어질 겨울을 잘 보내야 한다. 매일 매일 비가 오는, 4시부터 어두운, 아침 9시에도 어두운 긴 겨울을 잘 보내야 한다. 겨울이 왔을 때 해가 쨍쨍한 나라로 여행가서 살 수 없으니까 말이다. 오전 수업이 없는 아침에는 커피 내려 글을 쓰고, 공부하고 싶던 경제학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4.5미터 깊이의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읽고 싶은 책을 몇시간씩 읽고, 맛있는 안주에 캐나다 와인을 마시고, 주말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거나 비 오는 공원을 걷고, 겨울 방학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밴쿠버에서의 겨울 일상은, 한국에서 스트레스에 허덕이며 일하던 내가 너무도 바라던 차분한 일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