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던 에어비앤비 할아버지의 말씀

자이온캐년 국립공원(Zion Canyon National Park)

by 조각

살면서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 말들이 있다. 내가 고민하거나 걱정하고 있는 것을 정확한 순간에 어루만져주고 깨달음을 주는 그런 문장들. 누군가에게 들을 때도 있고 책을 읽다가 마음에 닿는 문장을 발견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마치 이 깨달음을 위해 이 사람을 만났거나 이 책을 집어들은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자주 있지는 않은 그런 말들은 내 안의 방향키가 되어 오래도록 힘을 발휘한다. 이번 미국 여행 중에는 시골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할아버지가 해준 말이 그랬다. 아주 오랜시간 그 할아버지의 말이 내게 힘을 줄 것임을 알았다.


그랜드캐년에서의 2박 3일 캠핑을 마치고 새벽부터 자이온 캐년 국립공원(Zion Canyon National Park)으로 향했다. 여행을 준비하기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인데 미국인들 선호도 1위인 국립공원이면서도 주차 자리가 부족해서 새벽에 가지 않으면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했다. 4시 30분, 동트기 전의 하늘색은 밝은 듯 푸른 듯 아름다웠다. 일출을 보거나 동트기 전 길을 떠나는 우리가 낯설고 재밌었다. 그렇게 도착한 자이온 캐년 새벽의 트레일은 고요했고 푸른 필터를 씌운 듯 다른 색감이었다.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아기 사슴이 풀을 뜯는 모습도 만났다. 물이 흐르고 들꽃이 피고 풀이 많은, 요정이 나올 것 같은 길이었는데 이 시간의 숲속은 처음이라 인상깊었다. 차분하고 신비로웠다. 자이온 캐년에서는 가벼운 트레일만 걷기로 해서 즐겁고 산뜻한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였더니 아직 오후인데도 만 오천보를 넘게 걸어 피곤해서 묵기로 한 시골 에어비앤비의 체크인 시간인 3시에 맞춰 들어갔다. 연달아 차에서 자면 피로가 쌓이니 쉬어가려고 예약한 숙소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정말이지 마음 깊이 영감을 얻었다.


연달아 캠핑을 해 조금 지친 우리에게 호스트인 더그 할아버지는 직접 지으신 아늑한 집을 소개해주셨다. 할아버지는 오래된 가구를 얻어와 손수 고치는 것을 좋아해 집의 많은 것을 직접 만드셨다고 했다. 아늑하고 묵직한 나무톤의 거실과 주방에는 아주 오래 전 냉장고처럼 쓰이던 나무함을 고쳐 만든 수납함이라던가 세계에서 수집한 빈티지 티스푼이 걸려있었고 해가 들 때의 빛을 집안으로 들이고자 동쪽으로 통창이 나있었다. 아름다웠다.



통창 옆의 문을 열고 나가면 더그 할아버지의 아내 로사리오 할머니의 고향 멕시코의 전통 방식으로 지은 집이 있었다. 여름이면 주렁 주렁 열리는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는 포도나무 덩굴 아래를 걸어 할머니의 집으로 가면 태양 장식이 박힌 붉은 벽은 유리병으로 꾸며져 있고 그 집 안엔 할머니의 주방이 있었다. 커다란 화덕 주변엔 도자기들이 많았고 할머니는 화덕에서 또띠아도 만들고 감자도 피자도 굽는다면서 무엇이든 무척 맛있어진다고 했다. 주방을 지나 밖으로 나가면 천장이 유리로 되어있어 침대에 누우면 하늘을 볼 수 있는 할머니의 침실이 있었고 그 뒤로는 온갖 과일 나무가 심겨진 정원이 있었다. 체리, 살구, 사과, 복숭아 등등 온갖 나무가 작은 초록색 열매를 품고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집을 소개해주는 동안 일주일 전 구조했다는 어린 고양이가 깡총깡총 뛰어 우리 발치를 따라다녔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고향에서의 생활 방식을 지속하고 싶어 아무것도 없던 땅에 이런 보금자리를 손수 만들어 살아가시는 것이 멋있었다.


이 아름다운 집에서 편안히 지내라고 해서 우리는 장봐온 재료로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어 바깥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포도나무 덩굴이 타고 올라간 기둥엔 벌새를 위한 꿀물통이 여럿 걸려있었는데 쉴 새 없이 벌새들이 날아와 꿀물을 마셨다. 빈 땅을 사서 이 모든 집과 정원을 만드셨다는데 건축학이나 토목공학을 전공하시고 관련된 일을 하신건지 궁금해하며 우리는 그 곳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나무로 된 가구를 좋아하고 남편은 기계공학을 전공해서 언젠가는 목공을 배우면 좋겠다는 얘기를 종종 해왔다. 그렇지만 일이 바빠 목공을 배울 수 시간은 없었고, 나중에라도 목수가 되는 것은 어떻겠냐는 나의 농담에 남편은 그런건 감각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며 취미로만 하겠다고 했었다. 나는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원주택에 살아보고 싶기도 했는데, 바쁜 와중에 집의 이곳저곳을 손보고 텃밭을 가꾸는 생활을 할 자신은 없어 아주 아주 나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취미로 집안의 가구를 만들고 식물을 키우는 우리 부부의 모습만 가끔 떠올릴 뿐이었다. 실현 불가능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삶을 구경하니 재미있었다. 그저 평화로웠다.


그 때 마당 한켠의 오두막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그 오두막은 할아버지의 작업실이라고 무엇인가를 만드는게 재밌다고 하셨다. 직접 설계해 만든 식품 건조기도 보여주시며 여름에 나는 과일들을 여기에 말려 겨울동안 먹었다면서 재미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90살 가까이 되어보이는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태어나 아주 가난했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고 하셨다.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잘 살고 있다고. 우리에게도 너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유타주의 주황색 산이 해 질 때 달라지는 색을 바라보라고 말하시곤 또 어디론가 가셨다.

할머니의 화덕 위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겠는 아깽이와 할아버지

이번 여행 중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가 뜨기전 일어나 일출을 볼 수도 있고, 3~4시간짜리 어려운 트레일을 건강하게 걸을 수 있었다. 1도 정도의 추운 날 불을 피우고 불가에서 책을 읽다가 차에 들어가서 푹 잘 수 있고, 동전 샤워실 시간 제한이 5분인데 타이머가 고장난 것은 아닐까 의아할 정도로 충분하게 씻을 수 있었다. 로션 하나, 샴푸 하나로도 개운하게 지낼 수 있었다. 친정집에 가서도 잠자리가 바뀌어 제대로 자지 못하고, 따뜻한 물이 아니면 씻지 못하고, 여행다닐 때 쓰던 스킨 로션 샴푸 트리트먼트 등등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다니던 나는 누구였나싶게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자연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감탄했다. 아주 즐거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이런걸 깨닫던 중 이 집에서 하루를 머물며 새소리를 듣고 벌새를 구경하고 찬란한 햇빛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아기고양이와 놀았다. 할아버지가 준 생꿀을 커피에 타 마시며 평온하고 충만한 삶의 일부를 조금 맛보았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나는 성실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학원에 다녔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땐 공부를 열심히 했다. 특히 고등학교 땐 스탑워치를 끼고 살며 하루 10시간 공부량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에 가서는 영어 점수를 따고 취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좋아하는 일들도 부지런히 챙겨 누렸다. 친구들과 놀았고, 여행을 갔고, 취미생활을 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누리며 직장 생활을 했고 또래들처럼 매일 회사 가기 싫어하고 힘들어하고 때려치우겠다고 한탄하면서도 또 다시 노력하여 10년 만에 외국에 나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런 여행을 하는 중에 나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삶을 살고 계신 할아버지에게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30대 중반, 문득 인식해보니 너무나도 젊은 나이이다. 90살의 할아버지도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면서 집의 많은 것들을 새로 만들면서 즐겁게 지내시는데 30대 중반의 나는 이미 내 삶의 경로는 10대 20대의 내가 다 만들어놨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쭉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노후 준비를 위해 월급으로 제태크도 좀 하고, 잘 살기 위해 현실에 발을 붙이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다시 노력해야만 한다고. 목수가 되거나 주택에 사는것조차 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이라고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면 다들 그렇게 애쓰며 현실을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에어비앤비에서 떠나면서 할아버지에게 Have a Nice Day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Always (언제나)


머리에 헤드랜턴을 끼고 환하게 웃으시며 할아버지가 대답하셨다. 언제나 좋은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


이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는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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