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터레이크, 요세미티, 조슈아트리, 그랜드캐년, 브라이스캐년, 엔텔로프캐년, 자이온캐년 등 지난 3주 간 미국의 거대한 대자연 이곳 저곳을 걷고 캠핑을 하며 이 생활이 얼마간 익숙해졌다. 주로 누워 지내던 집돌이 집순이 부부가 미국 로드트립이 익숙해졌다고 하자니 좀 웃기지만 실제로 그랬다. 마음은 편안해졌고, 어떤 풍경에 휘둥그레 놀라지는 않게 되었다. 몸은 조금쯤 지쳤고 여행 초반의 고양된 기분은 차분해졌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기대 반 안도 반의 마음으로 최종 행선지인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변화무쌍해서 하루에 4계절도 경험할 수 있다고 들은 옐로우스톤에 들어서자 먹구름이 가득하고 비가 쏟아졌다. 6월초의 공원은 이제 막 눈이 녹아서인지 도로 이곳저곳이 엉망으로 부서지고 패여 있었고 안보이는 시야에 차는 무척 덜컹거렸다. 인터넷이 끊겨 일기예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미 6시간을 넘게 달려와서 해가 지기 전에 캠핑장에 도착해야한다는 긴장한 마음으로 첫날 묵을 메디슨 캠핑장으로 향했다.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그치더니 해가 났다. 그리고는 무지개가 떴다.
와아- 무지개 아래 강가에 바이슨 한마리가 나와 있었고 그 뒤로는 뜨거운 물에서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풍경은 또 처음이었다. 다른 나라가 아니라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판타지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에 감탄하며 긴장이 풀렸다. 낯선 곳에 들어선 설레는 기분이었다.
9시에 해가 지니까 아직 1시간이 남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차가 꽉꽉 막혔다. 을씨년스러운 도로 한가운데에 길게 늘어선 차는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앞의 차에서 사람들이 내려 확인하기에 나도 한번 내려봤다. 이번엔 수십마리의 바이슨떼가 도로를 건너며 자동차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동차만한 고동색의 바이슨들을 멀리서 보니 신기했지만 우리차에 저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무서울 것 같았다.
낯설고 신기한 풍경에 하하하 웃으며 달리는데 이번엔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도로에 와글와글 모여있었다. 커다란 대포카메라를 든 사람들이었다. 허둥지둥 차를 대고 내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부엉이가 있다고 했다. 상기된 얼굴로 알려주는 사람들. 나이가 지긋한 분들도 젊은 여자도 꼬맹이도 있었다. 다들 탐험가같은 옷차림에 커다란 쌍안경을 목에 걸고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기쁨으로 빛나는 사람들을 보니 동물 덕후들은 다 이곳에 모이는구나 싶었다. 이 낯선 모습에 즐거워하며 우리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장에서 물을 끓여 보온물주머니에 넣으려고 보니 가스를 잘못 사서 물을 데울 수가 없어 그냥 옷을 껴입고 잤다. 초겨울의 온도였는데도 그냥 잘 잤다. 이 생활이 익숙해졌나보다.
둘째날 캠핑장에서 일어나 우리는 일찍 북쪽으로 향했다. 동물들은 새벽부터 이른아침에 제일 활발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송아지를 핥아주는 엄마 바이슨도 가까이에서 보고, 너른 초원을 달리는 그리즐리 곰도 봤다. 운전하다보면 차들이 도로가에 세워져있고 많은 사람들이 쌍안경이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 그러면 무조건 내려야 한다. 동물 덕후들이 무언가를 신나게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원에는 야생동물이 무척 많고, 동물을 사랑하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본격적인 장비들을 들고 길을 서성이고 있다. 어쩔땐 자리 펴놓고 동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먼 초원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우리도 그 중 하나가 되어 작고 귀여운 망원경으로 열심히 초원을 살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순수하게 즐거웠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인터넷이 안터지기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5박을 예약해두어 조금 심심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심심할 틈이 없었다. 포켓몬고나 동물의 숲같은 게임의 현실판 그 자체였다. 어디든 차를 몰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무엇이든 발견할 수 있었다. 엘크와 아기 엘크, 수십마리의 바이슨, 그리즐리 곰, 흑곰, 코요테.
북쪽에 도착해서는 맘모스 핫스프링스와 노리스 가이저를 걸었다. 뜨거운 물이 바닥에서 샘솟고 때때로는 하늘 높이 물이 치솟고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근처의 나무들은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렀고 유황 냄새가 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오래 전 처음 이 곳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곳이야말로 지옥이라고 생각할 법 했다. 다시 비가 내려서 우비를 입고 그 곳을 한참 걸었다. 어디를 여행해도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까. 지옥의 한 가운데를 걸어다니는 기분으로 붉고 노란 바위 위를 걸었다. 여기 저기서 피어오르는 가이저의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낯선 자연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수십마리의 바이슨을 계속 바라보며 둘째날 숙박지인 그 유명한 올드페이스풀 인에 도착했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이 숙소는 고전에서 읽던 여관방 같은 모습이었다. 두꺼운 통나무로 만든 벽을 자세히 보니 통나무 사이사이가 바이슨 털로 메워져있었다. 넘치는 것이 이 동물의 털이고 보온력이 좋겠으니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다. 나는 그저 웃음이 났다. 냉장고도 냉방시설도 없는 나무로 된 이 작은 방의 그야말로 빈티지인 의자에 앉아 미국 여행 내내 읽고 있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 이 공간에서 읽으니 더 실감이 났다. 책을 읽다가 밤에 로비에 나가보니 오래된 멋스러움이 가득한 안락의자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특히 책을 읽는 노인들이 눈에 담겼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행을 다니며 책을 읽고 싶기에 그런 장면들이 마음에 담긴다.
셋째날에는 방에서 늦게까지 쉬다가 11시에 나왔다. 그랜드 프리즈마틱 풀을 보러 가는 길엔 낮잠 자는 바이슨과 그 바로 뒤에서 강에 하반신을 담그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봤다. 송어 낚시로 유명하다던데 얼마나 낚시가 좋으면 집채만한 바이슨이 바로 옆에 있고 곰이 나올 수도 있는 초원 한가운데의 물 속에서 낚시를 하는걸까? 덕후들을 발견하는 것은 재미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한 사람들의 열정이 느껴져 덩달아 뜨거워지는 듯 하다. 그렇게 즐겁게 트레일을 걸어 전망대에서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파란 물을 바라보았다. 주황빛, 노란빛, 초롯빛으로 피어오르는 연기에 쌓인 크고 푸른 물, 이리도 아름다운 물을 볼 수 있다니 행운이다.
아름다운 것, 낯선 것, 몰입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둘째날을 보내고 브리지베이 캠핑장에 도착했다. 역대급으로 추운 날이라 장작을 한박스 샀는데 비가 자주 와 습도가 높아 불이 잘 안붙었다. 우린 그 간의 노하우로 종이컵에 휴지와 손소독제를 넣은 착화제를 3개나 만들어 장작 아래에 놓고 박스로 바람을 넣어가며 불을 키웠다. 작년까진 캠핑하는 사람들을 신기해만 했던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모닥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게 놀랍다. 2시간 넘게 불을 살려가며 추위 속 온기를 만들다가 해가 지고 잠잘 준비를 했다. 영하의 날씨로 무척 추워서 가지고 있던 옷들을 차곡 차곡 겹쳐 입고 얼굴엔 바프도 쓰고 물주머니를 안고 단단히 준비해 잠을 청했다. 편한 순면 잠옷이 아니면 예민해서 잠도 못자던 나는 미국에서 차박을 하며 어느때보다 숙면을 하고, 잘 자고 일어나 이른 아침을 여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행 끝무렵에도 놀랍기만 하다. 감기에도 몸살에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여행하는게 뿌듯하다.
뿌듯함 속에 일어나 넷째날 아침 수많은 새들, 아침 일찍부터 뛰노는 아이들,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쌀국수를 끓여 먹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옐로우스톤의 그랜드캐년에 가는 길에 또 다시 동물 덕후들 십 수명이 모여있는 걸 보고 내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쌍안경을 내어주며 엄마 곰과 아이곰이 누워있다고 알려주었다. 지나가던 차에서 어떤 사람이 무엇이 있냐고 묻자 사람들은 곰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동물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은 자꾸만 봐도 귀엽다. 그들과 함께 순수한 마음이 되어 엄마와 아기 곰을 바라보는게 무척 즐겁다. 그렇게 넷째날도 동물들을 발견하려 헤매고, 무스가 나온다는 강가에서 한시간 동안 기다리고, 아름다운 뷰포인트를 찾아갔다. 인터넷이 끊긴 단절된 나흘이 낯설고도 재미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무언가가 없으니 자꾸만 밖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휴대폰이 나오기 전 동네 친구들과 모래성을 쌓고 곤충을 관찰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넷째날 다시 올드페이스풀 인으로 돌아와 작은 수첩에 옐로우스톤에서 있었던 일을 쓴다. 내일은 옐로우스톤에서의 마지막 밤, 캠핑장을 예약해두었다. 비지터센터에는 내일 폭풍우가 온다고 써있었다. 예약해둔 숙박은 내일이 마지막이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여행의 끝무렵에 어떤 마음일지 몰라 그 때 마음가는대로 하려고 비워두었다. 파워 계획인인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다. 사실 아주 많은 일들이 내게 처음 있는 일이었던 이번 여행, 어린 아이가 된 듯 낯설고 즐거운 행성을 탐험하고 있는여행의 마지막 모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