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캐년의 일출, 캠핑장에서의 낮잠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 둘째날

by 조각

그랜드캐년에 해가 떠오르는 5시.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일출이라는걸 보고 싶어 한 적도 없었는데 거대한 대자연의 일출이라면 보고싶어 남편과 나는 의지를 발휘했다. 사실 그랜드캐년 안에 있는 마더 캠핑장(Mather Campground)에서 자서 30분만 일찍 일어나면 되었기에 할 수 있었다. 차에서 일어나 대충 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일출 포인트인 마더 포인트(Mather Point)로 이동했다. 붐비진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이런 이른 새벽에 일출을 보려고 나오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다.


우리도 조금 걸어 적당한 자리를 잡고 나란히 섰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가 궁금했다기 보다는, 이런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해가 모습을 드러내는것을 보려고 손을 꼭 잡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런 비일상적인 순간을 누군가와 언제나 나눌 수 있다는게 좋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얼마간 기다리자 해가 떠올랐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태양의 밝음에 오히려 그랜드캐년의 신비로운 지층이 어두워졌다가, 시간이 더 흐르자 캐년의 높은 봉우리부터 붉게 빛났다. 비스듬한 태양빛에 위에서부터 주황빛으로 물드는 캐년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황홀했다. 우리가 함께 보는 첫 일출이 머나먼 미국땅의, 20억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지층 위로 떠오른 것이라니 너무도 특별했다. 그 특별함을 감각하며 천천히 걸어 한시간을 보냈다.


해가 높아지고 하늘이 은은한 주황빛이 아닌 밝은 아침의 색이 되었을 때 우리는 둘째날의 일정인 브라이트엔젤 트레일(Bright Angel Trail)을 걸으러 갔다. 그랜드캐년에서 제일 유명한 트레일인 이 트레일은 10여km의 긴 트레일인데 우리는 어제의 카이밥 트레일에서 우아 포인트까지만 다녀온 것처럼 적당히 다녀오기로 했다. 왕복 2시간 정도, 새벽에 일어나 조금 무거운 몸으로도 꽤 힘든 트레일을 망설임 없이 걸으러 가다니 이번 여행의 우리가 낯설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이 변화 덕에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힘든 대자연을 마주하고 감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브라이트엔젤 트레일을 걸으며 내내 감탄하고, 등에 물건을 싣고 내려가고 있는 말들도 구경했다. 브라이트엔젤은 당일치기로는 다녀올 수가 없어 한참 내려간 아래쪽에 캠핑장이 있어서 1박2일 코스로 다닌다고 한다. 그 캠핑장에서 쓰는 생필품들을 열마리 남짓의 말들이 등에 지고 내려가는 것이라는데 정말이지 내가 모르던 딴 세상 이야기를 눈앞에서 보니 신기했다. 예전의 나라면 도대체 이런 건조하고 딱딱한 곳을 왜 20시간씩 걷는걸까, 왜 한참을 내려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고 또 다음날 움직이는걸까 짐작조차 못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어렴풋이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랜드캐년에 도착해 뷰 포인트에서 30분, 1시간 남짓 구경하고 떠나는 것과 트레일을 수 시간동안 한걸음 한걸음 걸어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앞의 방식은 효율적이고 편안하며 즐겁지만, 뒤의 방식은 아름답고 새로운 풍경을 더 오래 다각도로 볼 수 있으면서 성취감까지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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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일출을 보고 브라이트엔젤 트레일까지 걷고 돌아오니 오전 10시. 그런데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잠이 모자른 채로 뜨거운 햇빛이 그늘 없이 내리쬐는 트레일을 걸었으니 나의 비루한 몸이 지쳤나보다. 그래서 오늘 오후는 캠핑장에서 쉬기로 하고 점심거리를 사들고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샌드위치를 만들어먹은 후 이미 아침에 정리를 마친 차에 한 사람이 누울자리를 다시 만들었다. 차박 여행 중이라 짐이 많아 밤이면 뒷자석을 다 젖히고 자충매트를 깔고 침낭을 펼치고 나머지 짐들은 앞좌석에 옮겨놓고 잔다. 아침이 오면 잠자리를 정리한 후 앞좌석에 옮겨둔 짐을 다시 뒤로 옮긴다. 그래서 낮에는 누울 곳이 없는데 오늘은 쉬려고 뒷좌석의 한쪽을 접어 침낭 한개를 펼쳤다. 트렁크와 차 문을 함께 열어두니 바람이 솔솔 드나들어 선선하니 좋았다. 딱 좋은 온도에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한시간 정도 지났을까. 정신없이 단잠을 자고 나니 처졌던 몸이 조금 가벼워지고 뿌옇게 안개가 낀 듯 느리게 움직이던 머리도 맑아졌다. 그랜드캐년에서 2박 3일을 머물도록 여유있게 일정을 짜두었기에 쉬어야 할 때 자연 속 고요한 캠핑장에서 쉴 수 있다는게 퍽 마음에 들었다.


차에서 나와 남편에게도 한 숨 자라고 하고 나는 캠핑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남편도 피곤했는지 10분도 안되어 곯아 떨어졌다. 매일 오래 운전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고단하기는 했나보다. 스스로 일어날 때 까지 두기로 하고 나는 책을 마저 읽었다. 이곳에서만 사는 낯선 새소리만 가득 들리는,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고요한 한낮의 캠핑장에 앉아있으니 일상을 떠나 여행 중이라는게 새삼 실감이 났다. 이런 유명한 국립공원 캠핑장은 아침부터 낮까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가서 하이킹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 간단히 저녁을 먹고 다음날 일정을 위해 일찍 잠들기에 낮시간이 무척 고요했다. 책을 읽다가 조금 심심해져 캠핑장 안을 걸었다. 엘크 한 마리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에는 햇빛이 비추어 나뭇잎 그림자가 일렁였다. 노부부가 캠핑카 밖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차분한 기분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음에도 여행할 때의 태도가 비슷해서 좋다고. 미국 로드트립이라는 일생에 한번 뿐일지도 모르는 기회에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누리려고도 하지만, 무리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고 휴식을 취할 줄 안다. 유명한 관광지를 꼭 봐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심해서 고르며 우연히 만난 좋은 순간에 머무를 줄을 안다. 이 속도가 비슷한 덕에 우리의 여행은 언제나 싸우는 일이 없이 즐거운 편이다.


어느덧 이번 여행의 반을 지났다. 그랜드캐년에서의 낮잠은 하루의 쉼표가 아니라 긴 여행 중의 쉼표처럼 느껴졌다. 꿀같이 단 낮잠을 자고 회복했으니 가뿐한 몸으로 여행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밤에는 또 유독 잘 타는 장작을 바라보다 떠오르는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우면 잠에 들겠지. 저녁이 되면 캠핑장으로 돌아와 온기를 위해 불을 피우고, 불편하긴 하지만 나름 아늑하고 안전한 차에서 잠을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 다시 여행길에 오르는 시간들이 어느덧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는 것은 이런 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득 소중하게 느껴지는 캠핑장에서의 시간. 몇밤 남지 않은 이 시간들을 소중히 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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