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유명한 그랜드캐년을 가기로 했을 때 나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아마도 거대하고 새로운 풍경을 직접 보고싶다는 마음 정도였던 것 같다. 여행이나 세계 지리, 자연에 그다지 관심 없이 살아온 내게도 그랜드캐년이라는 이름은 익숙하니까. 그렇게 그랜드캐년에 도착해 그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강이 땅을 깎아내려 만든 캐년이 너무나 광활해서 그 오랜 세월이 물 밀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과 바람, 그 안의 작은 모래가 조금씩 조금씩 단단한 땅을 깎아 이렇게도 거대한 협곡을 만들어내려면 나의 상상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시간들이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그 시간들이 한 순간에 느껴졌다.
그 앞에서 나는 진부하게도, 한 없이 작아짐을 느꼈다. 세상의 어떤 곳에서는 수십억년동안 천천히 어떤 단단함이 새겨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인 나는 길어야 100년 남짓 잠시 살아가며 이 모습에 감탄하러 찾아온다.
자연의 영원과 위대함, 무한함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만을 살아내는 인간의 유한성에 내가 고민하던 것, 걱정하던 것, 욕심내던 것, 두려워 하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보잘것 없는 것인지 가슴 깊이 이해가 되었다. 그 앞에 선 순간에. 그러면서도 유한한 우리가 20억년의 시간을 간직한 협곡의 단층 앞에 서 있는게 감동적이기도 했다. 너무도 특별한 순간이라고.
한동안 조용히 눈물을 삼키다 생각했다. 여행 중 처음 보는 진귀한 자연의 모습을 많이 보고 있는데 왜 이곳에서 유독 감동하고 있는지를. 왼쪽을 보아도 오른쪽을 보아도 서로 비슷한 듯 끝 없이 펼쳐진 지층의 풍경은 오직 시간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지진이나 화산의 폭발로 솟아난 웅장한 산맥, 산사태나 눈사태로 만들어진 부서지고 깎인 암벽들, 겨우내 쌓인 눈이 봄이 되어 녹아 빠르고 거세게 쏟아지는 폭포의 모습에서는 힘에 압도되었지만, 이 고요한 캐년의 모습에서는 오직 기나긴 시간만이 느껴졌다. 작은 모래알과 한 방울의 물의 움직임이 오래 오래 느껴졌다.
그렇게 감동에 젖어 뷰포인트에 서있다가 2시간짜리 트레일을 가기로 했다. 이 곳에서 2박 캠핑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충분했다.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걸까 생각하며, 차로 이동해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뷰포인트로 몇 분 걸어가 얼마간 머무르는 여행만 하던 나는 요세미티에서 옆 캠핑장 할머니를 만난 덕분에 당연히 트레일을 걷는 사람이 되었다. 여행 중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위에서 바라보는 캐년의 모습이 이리도 감동적인데 그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하며 사우스 카이밥 트레일(south kaibab trail)로 향했다. 날은 맑고 더웠고 기분은 더 없이 산뜻했다. 협곡의 옆을 둘러 둘러 절벽을 내려가는 트레일을 걸으며 물이 땅에 새긴 세월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게 설렜다. 무엇보다 내가 이런 것에 설렘을 느낀다는게 낯설고 뿌듯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 즐거웠다. 그렇게 트레일을 걸어 조금 내려가자마자 나와 남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금 내려와 옆에서 보는 풍경은 또 이리도 다르고 멋지단 말이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트레일을 걸어 내려가는 것이 이렇게도 달랐다니. 왜 아무도 우리에게 어딜 가든 트레일을 걸으라고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누구든 우리에게 제발 그랜드캐년에서 트레일을 걸으라고, 뷰포인트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르게 20억년의 시간이 새겨진 지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들어보려고 뭔가를 보거나 읽어본 적도 없다. 아웃도어형 인간의 생활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먹었다. 우리처럼 운동을 좋아하지 않고, 등산은 왜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아웃도어에 관심 없이 살고 있는 집순이 집돌이들에게 알려 주어야겠다고. 집돌이 집순이 생활도 맘에 들고 좋지만 트레일을 걷는 것은 생각한 것보다 힘들지 않고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나 좋다고. 누군가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저렇게까지 집에서 읽고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몸에 근육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 저렇게도 재밌어하니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이 맛있는 것을 먹으면 좋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에게 식당을 알려주기도 하고 포장해서 가족들에게도 주기도 하는 마음처럼, 누구든 대자연을 걷는 것의 놀라운 기쁨을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아 여행기를 쓰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빛깔의 캐년을 바라보며, 그저 우와. 와. 감탄하며 내려갔다. 그렇게 걷다보니 이 트레일에는 중간 중간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힘겹게 올라가는 등산과는 달리 아래로 내려가는 트레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컨디션이나 가진 물의 양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감탄하며 휘적 휘적 내려가다가는, 올라오는 길에 물이 부족하고 체력보다 과하게 운동하게 되어 탈수가 일어나는 등 위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만큼 감탄만 하고 있어서 경고문을 볼 때마다 마음을 다 잡고 컨디션을 살폈다. 그랜드 캐년의 여름은 건조하고 더우며 그늘이 없기 때문에 확실히 위험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트레일의 첫번째 뷰 포인트인 우아 포인트(Ooh aah point)까지만 갔다가 올라오기로 했다.
우와-
얼마간 더 내려가다보니 시야가 탁 트이며 끝 없이 펼쳐진 캐년의 모습이 가까운 듯 먼 듯 펼쳐졌다. 저절로 우와~ 하게 되는 전경이었다. 그리고 귀여운 팻말에 우아 포인트라고 써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다. 모두가 와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사람이 한 명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랜드캐년 림 트레일(캐년을 위에서 바라보며 걷는 둘레길)에 머물기에 아래 쪽에서 우리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마치 우리의 것인 양 고요하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었다. 종종 도착하는 사람도 바위에 걸터 앉아 조용히 앉아있었고, 우리도 바위에 앉아 시간이 만들어 낸 마법 같은 풍경을 오래 오래 누렸다.
그리고는 다시 걸어 올라왔다. 여기까지 내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우아 포인트에서 잠시 머물고 더 내려가던데 우리는 그럴 수 없는 몸을 가졌기에 더 내려갈 수 없었다. 그렇게 올라오는데 덥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려오는 방향에서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그랜드 캐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뒤를 돌아 올라가는 길에는 그 모습도 보이지 않고 연갈색의 땅과 메마른 흙이 주로 보이기에 정신적인 고양됨이 가라 앉아 지쳤다. 트레일의 좋은 점을 깨달았다고 한들 여행 열흘만에 근육과 체력마저 다른 사람처럼 바뀔 수는 없는 것. 등산 스틱에 매달려 가다시피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작은 나무라도 있어 그늘이 있으면 멈춰서 앉아 쉬며 느릿 느릿 돌아가다보니 이제 그만 걷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는 트레일에 내 다리가 아니면 나는 돌아갈 수가 없다. '우와 우와' 하며 내려올 때와는 달리 '아이고 아이고' 하며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길 옆 깎아지른 곳에서 큰뿔양(빅혼쉽)이 걸어올라왔다. 이 무슨, 사파리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올라선 큰뿔양은 유유히 내 앞을 지나쳐 왼 쪽으로 조금 올라가더니 멈춰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인간들이여 나를 보고 감탄하라-' 하는 듯한 포즈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내려오던 사람들도 올라가던 사람들도 이 동물을 발견하고는 다들 내적 감탄하며, 오 마이 갓!을 입모양으로 외치며 발걸음을 멈추고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서 본 이 동물은 멋있었다. 뿔도 멋지고, 회색인듯 베이지색인듯 하얀 털도 멋지고, 느릿느릿 앉아서 쉬는 모습도 멋있었다. 야생동물을 만나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다시 정신력이 돌아와 쌩쌩해져서 큰뿔양을 한참을 구경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걷는 길은 아까처럼 힘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또 야생동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몸의 무거움을 잊게 해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은 위에서만 있었으면 만나기 어려운 동물을 트레일을 걷다 보니 이리도 가까이서 만났다는 생각에 역시 트레일을 걷는 것은 재밌고 즐겁다고 생각하며 걸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아까까지는 캐년의 멋진 모습도 안보이는 메마른 흙길이 이제는 야생 동물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풍경으로 바뀌어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다. 다른 동물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즐거운 기분으로 트레일을 마칠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실컷 보고, 야생동물도 만나고, 성취감도 가득한 채 캠핑장 옆 마트에서 저녁거리와 장작을 사가지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더운 날 한참을 걸어 샤워를 하러 갔는데 샤워실 앞에 엘크가 두 마리 있었다. 이 무슨, 사파리도 아니고. 샤워실 앞에는 캠핑카에 물을 채울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 그곳에 늘 물이 고여있으니 엘크가 언제나 방문한다고 했다. 크고 멋진, 생각보다 근육질인 엘크를 구경하다 개운하게 씻고 산뜻한 기분으로 저녁을 먹으러 캠핑장으로 향했다. 그랜드캐년에서 캠핑이라니, 그 덕분에 시간 여유가 있어 트레일도 걷고 엘크도 보니 캠퍼가 된 게 새삼 좋았다. 이 곳은 전세계에서 손꼽히게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캠핑장 시설이 꽤 좋았다. 샤워실도 깨끗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도 있고, 마트도 무척이나 컸고, 김치마저 팔았다. 쾌적한 캠핑장에서 샌드위치와 컵라면을 먹고 나니 일몰 시간이 되었고, 해가 지자마자 쌀쌀해져서 장작에 불을 붙였다. 날씨도, 여행 중의 기분도 순조로워서 그런가 장작도 잘 탔다. 캠핑을 하다보면 불멍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건조한 날씨에 나무에 불이 잘 붙으니 불멍도 쉬웠다. 우리는 나파밸리에서 한 병 사온 와인을 따 마시며 책을 읽었다. 술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이 와인이 너무 맛있다며 좋아했고, 나야 원래 와인을 무척 좋아하니 행복해하며 초콜렛을 안주 삼아 먹었다. 그러는 동안 하늘이 어둠에 물들고 달과 별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행복이 여기에 있음을 정확히 느꼈다.
밤이 깊어지고 무수한 별이 빛날때쯤 우리는 내일 새벽에 일어나 그랜드캐년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러 가기로 했다. 서른 중반이 되도록 일출을 본 적이 없고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던 우리는, 20억년이라는 시간이 새긴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협곡 위로 태양이 떠올라 빛을 비추는 풍경을 보고 싶었다. 마침 그랜드캐년의 캠핑장에 있으니 20분 전에만 일어나면 되기에 그 편안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랜드캐년의 일출을 본다고 갑자기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한낮의 캐년을 보며 인생이 찰나같이 짧다는 것을 느꼈듯이, 그러니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들은 흘려보내고, 순간을 소중히, 온 마음을 다해 삶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졌듯이, 새벽녘 떠오르는 해를 보며 이 마음이 더욱 여물기를 기대하며 고요한 밤 차 안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