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서는 미용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얼굴이나 머리를 아름답게 매만지는 것은 자존감을 올려주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꽤 드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화장을 하고, 퇴근 후 피부가 상할 새라 공들여 화장을 지우고 크림을 바른다. 한두달에 한번은 미용실에 가서 뿌리 염색을 하고 가끔은 푸석한 머릿결을 살리기 위한 관리도 받는다. 반년에 한 번은 펌을 한다. 주기적으로 떨어진 화장품도 사야한다.
20살 때부터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가을 웜톤이라고 생각하며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해 뿌리염색과 전체염색을 반복해왔다. 그 세월이 10년을 훌쩍 넘은 지금 나는 미용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냥 한번 미용에서 벗어나보고 싶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미용 없는 생활은 불가능할꺼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서도 미용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은건 자유로운 지금에 취한 섣부른 용기일까?
피부 화장을 하지 않은건 5년 되었다. 5년 전 결혼 준비를 하며 일주일에 한번씩 피부 관리를 받을 때였다. 그 해 여름은 너무 더웠고, 에어컨 가동에 인색한 회사 사무실의 온도가 높아 세수라도 해야 살 것 같아서 피부 화장을 못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어푸 어푸 세수를 하느라 로션이나 바르고 회사를 다녔다. 결혼식날을 내 인생에 제일 예쁜 날로 정해놓고 달리듯관리를 받으면서 피부 화장까지 하지 않으니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피부도 깨끗해졌다. 나는 늘 피부 트러블로 고생하며 맞는 화장품을 찾느라 애먹던 사람이었는데 그 때 피부 화장을 걷어낸 뒤로 선크림만 바를 수 있게 되었다. 비비크림이나 파운데이션을 걷어내면 피부가 숨 쉬듯 가볍다는건 다들 알지 않을까.
색조 화장을 하지 않은건 3년 되었다. 4년 전 나는 과로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을 아주 잃었다. 회사에서 쓰러졌고, 한 번 쓰러진 몸은 또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면역 체계가 고장났는지 아이라인을 그리면 눈가에 다래끼가 나고 입술은 마구 부르트고 두드러기가 올라와 따가워 음식을 먹는 것도 힘들었다. 무쌍에 10년도 넘게 펜슬 아이라이너로 두꺼운 아이라인을 그려온 나는 눈화장을 포기할 순 없었다. 립스틱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작아진 눈의,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회사를 다닐 수 없는 노릇이니까. 다래끼가 나으면 다시 섀도우를 바르고 라인을 그리고 약 먹어 입술이 살짝 나아지면 립스틱을 발랐다. 고장난 몸은 그대로인데 약으로 달래고 다시 화학 제품을 발랐으니 다시 탈나기를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그런다고 대단히 아름다워 지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대단히 추해지고 싶지 않아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 이내 어쩔 수 없이 눈 화장은 포기하고 예민한 피부를 위한, 착하면서 발색도 예쁜 립밤 제품들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맞는 립밤을 찾게 되어 몇년 째 그것만 쓰고 있다.
아픈 이후로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눈화장 대신 속눈썹펌을 하고 립밤을 바르는 수준의 미용을 하며 지내다가 1년 반 전 외국에 나오며 미용실 가는 것을 끊었다. 작년 6월 외국에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뿌리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갔는데 물가 비싼 밴쿠버에서 매번 뿌리염색을 하며 갈색 머리를 유지하고싶지 않아졌다. 검은색으로 염색하겠다고 하자 원장님은 후회하지 않겠냐고 말렸다. 후회는 하겠지만 어차피 외국 가서 뿌리염색하면서는 못사니까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고, 그 결과는 의외로 내 안색을 더 밝게 해주고 훨씬 더 어울렸다. 거의 15년을 갈색 머리로 살았는데 검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릴줄은 전혀 몰랐다. 펌도 함께 한 그날 6시간을 미용실에 있었다.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지루해서 미용실을 좋아하진 않지만 몇달에 한번씩은 그렇게 사는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그건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외국에 나와 미용실 한번 가지 않다가 머리가 너무 많이 길어 겨울에 미용실을 찾았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나 싶어 아주 짧은 칼단발을 했다. 세상에, 턱 끝보다 한참 위에 잘린 머리는 감기도 말리기도 편하고 가볍고 내게 잘 어울렸다. 짧은 머리로 살아가는 삶이 이렇게나 가뿐했다니 여태 모른게 억울할 정도였다.
1년 반동안 캐나다에서 지내며 두 번 미용실에 가서 15분 안에 칼단발로 자르고 나올 때의 시원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귓가에서 찰랑거리는 머리를 느끼며 사뿐 사뿐 걷는다. 아침에 세수하고 로션과 수분크림을 찹찹 바르고 선크림 하나, 립밤 하나 바르고 집을 나선다. 나의 맨 얼굴이나 외출할 때의 얼굴이나 드라이를 했을 때의 머리나 안 했을 때의 머리나 거의 차이가 없는 생활. 나는 지금이 너무 너무 너무 좋다.
1년 반 전 외국으로 나오며 아이브로우나 블러셔 같은 것들을 챙겨왔는데 유통기한이 지나며 다 버렸다. 다 버린 후 다시 사지 않았다. 발표나 세미나가 있을 땐 화장을 해야만 제대로 준비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없어서 못한다. 연휴나 방학이면 여행을 떠나고 자주 캠핑을 가는 외국 생활, 필수품인줄 알았던 화장품 짐이 대폭 줄어 기내용 캐리어 하나면 일주일 여행도 거뜬하고, 펌 없이 짧은 머리는 윤기를 되찾아 헤어 제품도 필요가 없어 비웠다. 시간도 돈도 남는다. 무엇보다, 상쾌하고 뿌듯한 기분이 남는다. 퇴근하고 돌아와 맨 얼굴로 돌아가면 스스로가 못생기게만 느껴졌었는데,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비교할 다른 얼굴이 없으니 오히려 자존감이 올라간다.
아마 철저히 익명인 외국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용을 덜어낼 일은 없었을 것 같다. 한번 해볼까 싶다가도 공들여 화장하고 스스로를 가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용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저런 미용을 덜어냈다고 해서 내가 못생겨 지지도, 볼품없어 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움과 본래 가진 건강을 되찾았다.
나는 요즘 신경 써서 식단을 꾸리고 주 5회 이상 운동을 한다. 달리기도 스트레칭도 하이킹도 근력 운동도 하고 채소와 과일을 챙겨 먹으며 지난 날 잃었던 건강을 다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없이 튼튼한 몸을 느끼고 있다. 얼굴이나 머리를 아름답게 매만지는행동은 하지 않지만 내 몸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공들이고 있다. 좋은 습관으로 미용을 대신하며 앞으로를 살아갈 생각이다. 달랑 달랑 가벼운 짐만을 챙겨 훌쩍 여행을 떠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