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공감할 감각. 작은 습관이 주는 뿌듯함과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다는 느낌. 먹고 사는 일로, 해내야 하는 일로, 사소하지만 중요한 집안일로 촘촘히 채워져 흘러가는 시간들을 살아내다 보면 문득 내가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어느 순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정처 없이 걷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낯선 곳에 서 있는 듯한 느낌 말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지금을 작은 습관들로 알아채며 산다. 일주일에 한 두번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이틀에 한 번 잠들기 전 일기장을 펼쳐 달력을 채우고 하루치 감상을 쓰면서, 아침에 일어나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바쁜 시기엔 이 습관들을 잊고 지내다 정신 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식이다. 돌아오고서야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길게는 20년, 짧게는 1년 반 된 습관에 작은 습관 하나가 더해졌다. 이제 한 달 된, 그림 그리는 습관이다. 주로 멍하니 핸드폰 보던 밤 시간에 자리잡은 이 습관 덕에 요즘 나는 조금씩 더 뿌듯하다. 침대에 앉아 그림을 그리면서 천천히 나아지는 그림을 눈치채는게 즐겁다. 이번 주에는 간단한 풍경 속 작은 사람을 그려보았다. 핸드폰 사진첩에 찍어둔 사진들을 꺼내어 그림을 그리는데 뭐 얼마나 연습했다고 그림 그리는 손이 거침 없었다. 좋아하는 바다 옆 산책길에서 등이 굽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걷는 모습을 찍어두었는데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기분이 퍽 괜찮았다. 그들의 굽은 등에서 아주 오랜 세월 함께 했음을 느꼈지만 한달 전의 나는 굽은 등의 사람을 그릴 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오랜 세월을 동반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과 부러움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또 어떤 날에는 여름에 친정 식구들이 밴쿠버에 놀러왔을 때 함께 캠핑가서 호숫가 그늘에 누워 있던 동생을 그렸다. 내 동생들은 캐나다 여행을 하는 내내 너무 소란스러웠는데, 햇빛 따뜻한 날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 동생은 조용해서 좋았다. 동생의 뒤 쪽에 앉아서 누워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라 원근이나 비례가 무척 어려웠다. 얼굴 형태를 제대로 그릴 수 없었지만 누워 있는 사람을 그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괜찮다. 원래는 커다란 풍경 속 손톱만 한 사람의 모습을 어색함 없이 표현할 수 있을 정도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연습하다보니 커다란 사람을 제대로 그릴 줄 알아야 그 비율대로 손톱만한 사람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러니 어렵더라도 여러 각도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걸 연습해야겠다.
어제는 밴프의 모레인 호수를 바라보았던 우리를 그렸다. 푸르게 반짝이던 호수를 배경으로 우리를 그려 넣으니 그 여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수채화 브러쉬로 모레인 호수의 색을 채우고 빛망울도 그려넣었다. 스케치가 조금 더 마음에 들어지니 채색도 더 재밌다. 연습하는건 싫고 그냥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던 어리석은 마음을 접어두니 즐거움을 느낄 도구가 늘었다. 집에서 그림을 그릴 땐 아이패드 프로크리에이터 앱으로 디지털 드로잉을 하다보니 내가 정석적인 그림을 그리는것보다 재밌는 느낌이나 인상 깊었던 부분을 강조하면서 자유롭게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은 어반스케치용 작은 파레트와 물붓, 만년필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러 나가는데 하얀색 젤펜이나 붓펜처럼 좀 더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는 그림 도구가 있으면 더 재밌을 것 같다.
생각하지 않고 그리다가 연구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느는게 눈에 보인다. 처음이라 빨리 느는 것이겠지만 이 즐거움을 깨달았으니 나중에 그림 정체기가 오더라도 이 습관은 계속 가져가고 싶다. 드문 드문 그리게 되더라도, 작은 스케치북을 챙겨 밖에 나가는 날에, 늦은 밤 침대에 앉아 프로크리에이터 앱을 여는 날에, 아- 잘 살고 있구나 하고 뿌듯함을 느끼고싶다. 그렇게 그림그리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