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여행 다니듯 살기에는 낯설고 새로웠던 밴쿠버에서의 생활이 스무달 째다. 어느덧 이 곳에서의 생활은 일상이 되었고 동네 산책을 다니듯 편안하게 다니는 장소가 늘었다. 집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높은 곳에서 로즈가든을 내려다보며 하늘과 산과 바다를 볼 수 있다. 30분 정도 걸으면 개들이 목줄 없이 신나게 뛰어 놀고 수영할 수 있는 해변이 있다. 반대쪽으로 30분 정도 걸어 긴 계단을 내려가면 백사장과 걸리는 것 없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밴쿠버의 서쪽 끝에 살고 있어서 자주 일몰을 본다. 고층 건물이 없는 곳에서 넓게 펼쳐진 하늘과 멀리 보이는 눈 쌓인 산, 그 아래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하늘색이 다채롭게 물드는 광경을 본다. 아마도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그리워할 것은 이곳 저곳으로 여행 다니며 입이 떡 벌어지는 대자연을 마주했던 순간도, 낯선 곳에서 운동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한 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날, 아무런 걱정도 없는 날에 편한 신발에 편한 옷차림으로 선선히 걸어나와 하늘과 바다와 나무를 바라보던 시간. 이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을 나중의 내가 선명하다.
이번주는 자연을 그릴 차례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보다 구름이 적당히 있는 날의 하늘색을 유독 오래 바라본다. 투명하게 파란 하늘이 아닌 날에는 구름이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해가 지고 난 후엔 분홍빛, 다홍빛, 보라빛으로 하늘이 물들었다. 그런 날엔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아름다움이 지나가는 것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남겨둔 사진을 꺼내어 그림을 그렸다.
하늘의 색을 오래 관찰하고 고심해서 색을 골라 흰 바탕에 칠할 때 미소가 번졌다. 하늘색이라는 이름의 하늘색이 있지만, 사실 하늘색은 너무 다양하다. 넓은 하늘의 색이 눈에 띄지 않는 듯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며 색을 골라 올리는게 즐거웠다. 그렇게 흰 바탕에 무지개를 그리듯 넓은 하늘색을 올리고 번짐 효과로 경계를 문질렀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모르겠듯 서서히 변하는 진짜 하늘과 달리 내 그림은 경계가 눈에 띄었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올린 하늘 아래 눈 쌓인 침엽수를 촘촘히 그려 넣었다. 어딜가나 키가 큰 침엽수가 빼곡한 밴쿠버의 산. 침엽수에 두꺼운 눈이 쌓인 날에 하이킹을 하면 나무를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저 아름답기 때문이다. 진한 녹색으로 나무를 그리고 그 위에 하얀 눈을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하는 풍경을 그리다보니 어느덧 엽서만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역시 사람 그리는 것보다 자연 그리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또 어떤 날에는 특별하게 화려한 하늘을 마주했다. 인위적으로 칠한 듯한 하늘을 우연히 마주쳐 한참을 신호등 앞에 서서 바라본 날이었다. 그 날의 하늘을 그리는 것도 즐거웠다. 분홍빛, 붉은빛, 보라빛, 푸른빛, 다홍빛을 두껍게 칠하고, 나무와 가로등을 그려넣었다. 밴쿠버에서의 하늘을 그렇게나 좋아해서 자주 바라보는데도 그림으로 그린 적은 잘 없다. 그림 그리는 습관을 들였더니 좋아하는 순간이 길어진다.
다른 날에는 하늘이 맑아서 일몰을 보러 차를 타고 나갔다. 밴쿠버의 겨울은 매일 비가 와서 하늘이 회색인 날이 많아 맑은날은 귀하다. Iona Beach Regional Park는 밴쿠버 공항 근처에서 시속 30km의 속도로 15분 정도 들어가면 있는 곳인데 생태 보호 지역이라 너른 바다와 호수가 그대로 있다. 건물 하나 걸리지 않는 그 곳은 너무 넓어서 하늘도 바다도 끝 없이 펼쳐진다. 특별한 음으로 노래하듯 소리내는 붉은날개검은새(Red-winged blackbird)가 많은 그 곳에서는 낯설고 경쾌한 새소리를 들으며 마음껏 하늘과 일몰을 볼 수 있다.
운 좋은 날에는 백조도 잔뜩 볼 수 있다. 바다를 향해 뻗은 길을 걸어가는 조그만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 하늘과 산 그림자 아래 작은 사람들의 형태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몇 장의 사진을 찍어와 그림을 그렸다. 앞으로는 어딘가 외출할 때 습관처럼 종이와 펜을 가지고 나가야겠다. 이렇게 그리고 싶은 풍경을 마주치면 당장 그릴 수 있게 말이다.그렇게 집에서 그려본 모습. 도란도란 대화하며 걷는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을 손톱만하게 그려넣는게 어렵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사람을 그리던 시간들이 오롯이 남았다.
좋아하는 밴쿠버의 하늘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기는 이번 주도 마음에 남았다. 사실 그림을 그리려고 앉을 때 마음 한켠에는 귀찮은 기분이 자리하고 있다. 편하게 누워 핸드폰을 보고 싶은 게으른 마음이다. 하지만 브런치 덕분에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요즘, 계속 그리다보니 귀찮은 기분은 조금씩 작아지고 손의 감각이 점점 익숙해진다. 곧 그림도구를 챙겨 밖에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