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래 신파에 민감한 사람이다. 큰 물통에 신파가 한 방울만 섞여도 그 물통의 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남들에게 감추어야 할 때면 흐르던 눈물을 눈물샘으로 다시 흡수하여 목구멍으로 넘기는 신공도 터득해두고 있다.
그런 만큼 큰 기대를 안고 플레이를 눌렀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이었다. 질소가스로 가득 찬 과자 봉지에서 건더기를 반도 꺼내 먹지 못한 채 꺼버렸다. 내가 알레르기를 가진 유형의 드라마였다.
도난 방지용 철망의 올처럼 촘촘하게 짜인 구성, 방울토마토 껍질같이 말끔한 대사, 끄트머리 어미 한 마디까지 힘을 실은 발음, 완벽한 타이밍으로 주고받는 티키타카, 완결형으로 다듬어낸 문장의 대화, 열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들뜬 연기, 연기자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는 적극적인 연기 자세, 이 모든 것들은 자연 생태계에서는 발견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적어도 내겐 거북한 것들이었다. 오랫동안 완벽주의자로 살기를 강요받았던 부작용임이 틀림없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가끔은 비겁하지만 커닝하듯 한 토막씩 다시 훔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쇼윈도에 진열된 반들반들 윤이 나는 플라스틱 제품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극 중 멘트처럼, 살면 살아진다. 살아진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 건 삶은 모르는 상태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지나치게 완벽하게 재연하려다 보면 매운탕 육수에서 비누 냄새가 나게 된다.
살면 살아지듯, 살아지는 대로 살면 된다. 드라마도 마찬가지고. 하늘에는 티끌도 날고 개울에는 구정물도 인다. 까놓은 알밤처럼 똘망 똘망하기보다 파스텔 톤처럼 으스름한 것이 더 인생답다. 그걸 담아내는 건 화면의 픽셀 하나하나를 일일이 통제하고 조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여백을 빽빽이 채우기보다 랜덤과 운에 맡긴 공란이 필요할 때도 있다.
높은 평점으로 기분이 업되어 있을 감독과 출연진들에게 미안하지만,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기생충이 큰 상을 받았음을 기억하며 미안함을 달랜다.
숨어 지내던 전직 킬러나 스나이퍼만 골라 보느라 영혼이 삭막해졌나 싶어 7번 방의 선물의 마지막 이별 장면으로 점검해 본다. 조금 이상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