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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

by 슈르빠

1.

규화보전을 수련하다 남성성을 잃은 동방불패처럼, 법을 공부하다 양심을 잃은 법관을 자주 발견하는 일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2.

고기쌈을 반으로 잘라먹은 외국인의 첫 입에 고깃 조각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알 수 없는 조바심에 사로잡힌다.


3.

끊어질 듯한 햄스트링을 부여잡고 죽을힘을 다해 기어오른 한양 도성길 위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동네할머니들을 마주칠 때면 탁 트인 서울의 전경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다.


4.

마우스의 배터리가 소진되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커서는, 숨이 끊어져 가는 생명체의 애잔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 과도한 클릭 질을 해대던 자신이 몹쓸 인간처럼 느껴진다.


5.

백팩의 커피를 담은 텀블러 속에서 얼음 덩어리가 달그락이는 소리를 멈춘 뒤에 찾아오는 고요함은, 전설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실존 가능성을 각인시켜 준다.


6.

"따로 연락이 없으면 안 된 겁니다"는 채용담당자의 말은, 이미 연락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들려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7.

순대를 많이 섞어 달라고 하면 순대가 더 비싸다고 하고, 내장을 많이 섞어 달라고 하면 내장이 더 비싸다는 어느 순대집 아줌마처럼, 정체 모를 사람들이 모래섬에 한가득 모여 우리의 평온한 영혼을 흩트려 놓을 궁리를 한다.


8.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갑자기 아랫배에 신호가 올 때, 인간은 가장 겸손해진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최면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에게, 생각나는 모든 죄의 용서를 구하고, 빠트린 죄가 없는지 샅샅이 살펴본다. 그래서 신은 죄 많은 인간들이 고속버스를 타기를 기다린다.


9.

고깃집에서 아무리 고기가 맛있어도 식당 직원 앞에서는 '대박!'이라고 탄성을 내뱉어서 안 된다. 영업이 끝난 뒤에 늦은 식사를 하는 직원에게는 전기 고문보다 무서운 고기 고문이 된다.


10.

댕댕이에게 만보를 걷게 하는 챌린지가 있다고 하자. 댕댕이가 걷는 걸음을 어떤 방식으로 카운트할지는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앞다리와 뒷다리 평균으로 하거나, 둘 다 합하거나, 뭐든 좋다. 그러나 주인이 안고 걸은 걸음까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면 챌린지는 접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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