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에게 새엄마는 가증스러운 여자였다. 정수가 중학교 1학년이던 지난해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이 채 안 돼 철규를 데리고 들어온 새엄마는 정수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병상을 지켜주었고, 자신이 데리고 온 철규보다 정수를 항상 먼저 챙겨주었다.
그러나 정수에게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한 가식으로만 느껴졌다.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정수의 그리움이 너무도 깊었지만 새엄마는 그런 엄마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가구며, 버티컬이며 집안의 모든 걸 바꾸었다.
엄마의 남은 흔적인 자신도 새엄마의 눈에는 고깝게 느껴졌겠지만,겉으로는 늘미소로 대하는 새엄마의 모습에서 정수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싸늘하게 돌아섰다.
어떨 땐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새엄마를 보고 있으면 역겹기까지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커져만 갔고 급기야아버지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그냥 아빠랑 나랑 둘이 살면 안 돼?"
"이러려면 나는 청주 할머니집에 가서 살래!"
"아빠는 새엄마랑 철규 데리고 잘 살아!"
"이 노무 자식이!"
아버지의 호통에도 정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돼!"
"정 그러면 방학 때 할머니 집에 가서 며칠 있다가 와!"
방학 시작하는 날 바로 청주로 내려갔다. 할머니는 평소와 달리 정수를 반기지 않으셨다.
"지 에미랑 같이 살지 여긴 뭐 하러 와?!"
"며칠 놀다가 에미한테 빨리 돌아가"
"새엄마랑 살기 싫어요!"
완강한 정수를 보고 할머니는 정색을 하시더니 "어이구" 하는 한숨과 함께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죽은 니 에미가 아이를 못 낳아서 할 수 없이 니 아비가 너하고 철규를 밖에서 낳아온 거여"
"너는 죽은 니 에미가 직접 키우고 싶다고 해서 어려서 데리고 왔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펄 벅 같은 대작가가 썼을 법한 거대한 장편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는 충격에 정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할머니, 지금 이게 말이 돼요?, 영화 찍으세요?"
"이놈이 할미한테 말버릇이.."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니 아비 한데 직접 물어봐라"
정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아버지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나 완전 소설의 주인공이 됐네, 이거 맞아?"
흥분해서 몰아치는 정수의 질문에 비해 아버지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그러게..."
골목으로 뛰쳐나간정수는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나 클 났어. 이제 어떻게 해, 나 엄마 아들 맞는 거지?"
엄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정수야 나 잊으면 안 돼, 알겠지?' 하던 말의 뜻을 이제야 깨달은 정수는 새벽이 오기까지울고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