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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르빠 May 30. 2024

동경의 밤

“성태야, 나 동경에 와 있어, 얼굴 한번 봤으면 해서”


수지에게서 7년 만에 온 문자였다. 뜻밖의 문자에 만날 장소와 시간을 회신하기까지 성태에게는 여러 번의 깊은 호흡이 필요했다.


퇴근을 재촉하여 만난 수지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가볍게 웃으며 수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머리 식힐 겸 왔어”


그동안 수지에 대해 쌓였던 성태의 분노와 의문에 비해 아무렇지 않은 듯 건네는 수지의 인사가 잠시 성태의 멘털을 자극했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 있나 싶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자카야 등불이 밝히는 우에노 철길 밑 거리를 거니는 내내 수지는 행복해 보였다. 수지의 얼굴에서 성태를 처음 만났을 때의 밝은 표정을 찾을 수 있었다.


수지는 그렇게 동경에서 사흘을 보냈지만 성태 머리에 가득 차 있던 의문과 서운함하나도 풀어주지 않은 채 한국으로 돌아갔다.


수지가 돌아간 후에 또다시 앞선 7년과 같은 공백의 시간이 이어졌다. 문자를 수없이 보내도 앞머리의 1이라는 숫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성태가 수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채플에서였다. 수지의 하얀 얼굴과 단아한 모습은 성태를 처음부터 끌리게 했다. 수지도 성태가 싫지 않은 듯했다. 성태와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고도 했다. 춘천으로의 기차 여행, 하늘공원에서의 산책, 흑석동 골목에서의 입맞춤이 그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성태는 어느 순간부터 수지에게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벽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성태를 멀리하더니 급기야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다음 학기에는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에게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친구들도 집안 사정으로 휴학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수지가 동경에 나타난 것이었다.



수지가 다녀가고 2년 후 성태는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 회사에서의 전망도 그렇고, 한국의 개발자들에 뒤처지고 있다는 압박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성태의 귀환을 환영하는 저녁 모임에서 친구가 입을 뗐다.

“너 옛날 사귀었던 수지는 세상을 떠났다며?”


“응? 뭐?”

깜짝 놀란 성태에게 친구는 말을 보탰다.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유방암이 폐로 전이됐다나 봐”

“그게 벌써 2년 전쯤인데, 모르고 있었어? “



성태의 발 앞에 새 한 마리가 불쑥 날아왔다. 머리를 쭈뼛쭈뼛하기도 하고 꽁지를 쫑긋쫑긋하기도 하더니 성태를 한번 흘긋 처다 보고는 훌쩍 날아가 버렸다.  


수지는 아버지의 부도와 연이은 부모님의 이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왔고, 그 이후에는 병원과 기도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수지는 자신의 무너진 모습을 성태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성태와의 시간만큼은 비참한 현실의 소용돌이에 흐트러지지 않은 소중한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싶었다.


성태는 떠나기 전 자신을 흘긋 처다 보고 날아 간 새에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었을지도 모를 그 행복의 기억 찾아 동경에 왔던 수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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