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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 Jul 30. 2022

평일 오전마다 어머님들과 수영을 합니다

수영장 텃세 문화는 얼마나 보편적일까  

동네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한 지 육 개월쯤 되었을까. 별 건 아니지만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들이 제법 쌓여 어디 한 번 우리 수영장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평일 오전 10시 '신배평접' 반으로 강습을 시작했다. '신배평접'은 신규+배영+평영+접영의 줄임말로, 처음 시작하는 사람부터 접영을 배워야 할 사람까지를 한 군데 모아놓은 아주 포괄적인 반이다. 어렸을 때 평영까지 수영을 배웠던 기억이 가물하게 있지만 별 자신은 없는 나에게 아주 적절해 보였다. 

암호문인가 싶었던 수영강습 시간표

내가 들어간 시간대에는 '어머니반'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수강생 10명 중에 7~8명이 50대 이상의 어머님이셨으니 그럴 만도. 재밌는 건 대부분 어머님들이 푸근한 체형과 달리 날쌘 돌고래 같은 영법을 선보이는 반면, 정작 늘씬한 젊은이들은 발장구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다시 자유형부터 차근차근 기초를 쌓아 올려, 몇 개월 후 접영까지 마스터할 수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이른바 '고수 레인'으로 넘어가 드디어 고인물 아주머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고수 레인의 어머님들은 다행히 나를 호의적으로 생각해주시는 듯했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어머~ 예쁜 사람이 왔네." 하며 젊은이에 대한 환영의 의지를 잔뜩 보여 주셨으며, 어머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어린 강사쌤과 닮았다며 남매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는 딱 봐도 20대인 그 쌤이 첫 시간부터 나에게 반말을 섞어 쓰는 통에 나도 같이 말을 놔도 되는 건지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그는 10대부터 70대 이상까지 모두에게 공평하게 반존대를 해오고 있었다. 수영 모자 아래로 흰머리가 성성한 할머님께도 "누가 그렇게 하랬어?", "이리 와 이리 와, 다시 해 봐." 따위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그. 건방져 보일 법도 한데 해실하게 웃는 눈웃음에 아주머니들의 마음은 사르르- 아아, 그는 이 구역의 박현빈이었던 것이다. 이곳의 법도는 이렇구나. 선생님이 학생에게 반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암. 나는 그 세계의 규칙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고수 레인 어머님들의 연륜은 대단했다. 최소 몇 년씩 수영 생활을 이어온 것처럼 보였으며, 저녁 수영까지 섭렵한 경우도 흔한 듯했다. 초보 레인에 있을 땐 선생님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일일이 자세를 체크하고 피드백을 주었었는데, 고수 레인으로 넘어오니 얄짤없었다. 자유형 10바퀴 돌고 오세요! 접영 발차기에 평영 팔로 두 바퀴! IM(접-배-평-자 순서로 반복) 5회! 이제 갓 접영을 떼고 넘어온 나에게는 가혹한 세계였다. 고수 레인에는 보이지 않는 룰이 있었다. 가장 잘하는 사람이 제일 앞에, 실력이 떨어질수록 뒤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못 하는 사람이 앞에 서봐야 뒷사람에게 금방 따라 잡힐 테니, 어찌 보면 효율성을 위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규칙이었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두 번째, 세 번째에서 출발하던 나는 뒷사람의 손이 내 발에 닿는 당혹스러운 경험과 그를 벗어나기 위한 숨 막히는 추격전을 몇 번 겪은 후에 자연스레 한 명 뒤로, 더 뒤로, 하며 나에게 적절한 자리를 찾아나갔다. 


그런데 내가 일주일 자리를 비운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난주 처음 등장했던 20대 신입, 도리에 맞게 제일 뒷 순서를 지키던 그녀였지만 언뜻 보기에도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 후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언제나 앞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열 1위 아주머니가 제일 뒤에 있던 그녀에게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수줍게 웃으며, 신입은 마다하지 않고 1위 자리로 당당하게 올라섰다. 그리고 한 마리의 독수리같이 힘차고 세련된 접영을 선보였다. 그때 나는 마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목격한 것처럼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는데, 나중에 왜 그렇게까지 그 장면이 충격적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 우리의 서열에 실력 외의 다른 요소- 그러니까 연차라든가 나이라든가 등등이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이 완전히 부서져버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몇 살이든 몇년차든, 오직 순수하게 실력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인식하는 우리 반 사람들이 꽤 멋지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서로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예의인 샤워 시간, 내 바로 옆에 있던 같은 반 아주머니가 그 규칙을 깨고 내게 말을 건 것이다. "아, 저.. 선생님 휴가 때 쓰시라고 휴가비를 만원씩 모아서 드리려고 하는데, 같이 하고 싶으면 저한테 주시면 돼요." 그리고 겸연쩍게 웃으며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다른 반은 이런 게 없는데 ㅎㅎ.. 여긴 이렇게 하더라고요...." 무리 생활에 능숙한 나는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 ㅎㅎ 현금이 없는데 계좌이체로 드려도 되죠?" 


문제는 그 이후로 일주일 동안 내가 수영에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단 그날 바로 계좌이체를 해드리려 했는데 알고 보니 폰을 주차장에 두고 온 상태였고, 다음에 현금으로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주일을 비우게 된 것이다. 다시 수영에 가는 날,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돈 안 냈다고 눈치 주면 어떡하지..?' 물론 내고 싶은 사람만 내면 된다고 했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게 곧이곧대로 들었다가 큰일 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솔직히 내 돈 내고 듣는 강습에 왜 선생님 휴가비까지 챙겨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만원 때문에 미운털 박히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 불편하느니 그깟 만원 얼른 내고 말지. 그날 강습 시간은 평소처럼 평화롭고 잔잔하게 흘러갔고, 계속 눈치를 보던 나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옆의 아주머니께 슬쩍 여쭤보았다.


"저, 혹시.. 전달드렸나요?"

"아 응~ 드렸지."

"아이고.. 저도 같이 하고 싶었는데, 일주일을 못 나와서.. 아쉬워요."

"(어깨를 두드리며) 에이 괜찮아~ 다음에 하면 되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또 마무리가 되었다. 휴가비를 내지 않아 나를 미워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고 편견이었던 것이다. 




최근 수영장에 초딩들이 많이 생겼다. 열 살쯤 됐을까, 어린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샤워실로 몰려오곤 하는데 그 광경이 또 흥미롭다. 어머 얘!! 분홍 모자 흘렸다며 한참을 소리 지르는 아주머니와 본인을 부르는지도 모르고 친구와 수다 떠느라 여념이 없는 꼬마 아이. 결국은 그 옆의 다른 아주머니가 모자를 주워 "이거 네 꺼 아니니?" 하며 손에 쥐어준다. 샤워실에 자리가 꽉 차면 생판 모르는 아이를 여기서 씻으라며 불러 세우는 아주머니도 있고, 씻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두어 명을 세워놓고 별안간 X꼬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안 그러면 X꼬물에서 놀고먹게 된다며 교훈을 단단히 새겨주시는 아주머니도 있다. 샤워실 입구로 나오면 학부모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이 혼자서 잘 씻고 제대로 수영복을 입는지 걱정 가득한 눈빛인데, 그 옆을 지나가면 그런 말들이 들려온다. "그래도, 아주머니들이 잘 챙겨주셔서 다행이야."


사실 수영장의 고인물들이 챙겨주는 대상은 비단 어린아이뿐이 아니다. 나도 처음에 끙끙대며 힘들게 수영복을 입을 때 옆자리 아주머니가 비누칠을 해서 입으면 쉽다는 꿀팁을 준 적도 있었고, 말보다 행동으로 시크하게 내 등 뒤의 꼬인 끈을 탁! 풀어주고 수영복을 쫙! 올려주고 사라지신 분도 있었다. 자칫 오지랖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행동들이겠지만, 사실 나는 이런 것들을 꽤 좋아한다. 내가 실제로 불편하든 불편하지 않든 그 말과 행동이 순수한 호의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나를 향한 그 호의가 마냥 즐겁고 따스하다. 그러니까 나는 쉽게 얼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어머님들이 나에게 얼굴이 어떻네, 몸매가 어떻네 하는 말들을 기분 좋게 넘겨 들을 수 있고, 심지어 그 관심이 신입에게 쏠릴 때면 묘한 질투심마저 느껴버린다.


닫혔지만 열려있고, 꼰대인 듯 편견 없는 이 사람들. 이 단단하고 말랑한 작은 사회. 나는 오늘도 호기심 가득하게 수영의, 정확히는 수영장의 세계를 탐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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