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좁은 자취방에 가둬 놓아서 미안해
나의 첫 보금자리는 성신여대입구역 근처, 돈암동이었다. 회사에서 버스 한 번 30분 거리라는 것 외에 그 동네, 그 집을 고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저렴해서. 5-6평쯤 되려나, 손바닥만 한 낡고 허름한 빌라 원룸이었지만 그래도 지하나 옥탑, 1층은 아니었고 큼지막한 창문으로 어설프게 햇빛이 들어왔으며, 방범창도 설치되어 있었다. 골목도 밝고 바로 옆이 번화가였다. 한마디로 젊은 여자 혼자 살기에 최소한의 구색은 갖췄다는 얘기다.
가족 품에 있다가, 룸메이트가 있는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정말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을 갖는 것은 처음이었다. 계약서에 엄숙하게 서명하고 영혼까지 끌어 모은 내 전 재산, 보증금 오백만 원을 이체하는데 약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혼자 비행기를 타고 훌쩍 멀리 떠나 낯선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그 막막하면서도 설레는 기분. 낯선 공기와 언어에 둘러싸여 불안하고 무서우면서도 아,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실감 나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월세 30만 원짜리 그 작고 낡은 집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서울 살이 중 가장 작고 볼품없는 냉장고와 부엌, 화장실을 가진 집이었지만 가장 부지런을 떨었다. 퇴근길 몇 천 원으로 알뜰하게 장을 봐와 그릇 말릴 공간도 없는 싱크대에서 지지고 볶으며 매일 같이 도시락을 쌌다. 옷장이 들어갈 공간도 없어 이단 행거를 설치했는데, 어디서 공간 분리가 중요하다는 건 주워 들어서 천장에 직접 레일을 박아 커튼도 달았다. 나름 컬러와 패턴을 심도 있게 고려해서 두 장을 떼다 달았는데, 막상 달아보니 아래 길이가 맞지 않아 들쑥날쑥했다. 뭐, 괜찮다. 스물다섯이면 한창 그럴 때 아니겠는가. 일도 사랑도 인생도 들쑥날쑥할 시기. 부족한 것 투성이인 나의 서울 라이프가 부정보다 긍정으로 가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 밑도 끝도 없는 합리화 능력 덕택일 것이다. 본래 의미부여를 좋아하는 나는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그럴듯하게 포장해 스무스하게 넘기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수십, 수백,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침대 종류를 다 보았을 것이다. 최종 선택은 벙커침대였다. 이층 침대에 대한 로망이 있기도 하고, 아래 공간에 책상을 둘 수 있어서 공간 활용도가 높았다. 생각보다 비싸서 새 제품을 사는 건 사치였다. 중고 사이트를 열심히 뒤진 끝에 같은 동네에서 헐값으로 파는 판매자를 찾을 수 있었다. 걸어서 5분이 안 되는 거리라 나와 내 남자친구, 그 집의 청년 둘 이렇게 네 명이서 직접 걸어서 나르기로 했다. 어쨌거나 처음 보는 사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데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판매자 분이 예의상 말을 먼저 걸어왔다.
“두 분 다 학생이신가 봐요.”
남자친구가 바로 답했다.
“아, 저는 학생이고 누나는 직장인이에요.”
그리고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이전보다 한층 복합적이고 심오한 정적이었다. 나는 내 옆얼굴을 흐리멍덩하게 반사하는 회색 빛 엘리베이터 내벽에 머리를 쾅 박고 싶었다. 불과 한 시간 전 그에게 학생이라 가난하다는 핑계를 대며 오천 원을 에누리했던 것이다. 아, 쪽팔려. 너무너무 쪽팔려. 다행히 그가 오천 원을 다시 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호모 사피엔스로서 갖춰야 할 양심과 고되게 쟁취한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자부심을 오천 원에 냅다 팔아 버린 나는, 사람은 역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깊이 새긴다.
집이 얼추 사람 사는 곳의 형태를 갖추어 가자 슬슬 내 자취 생활의 화룡정점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바로 부모님 댁에 귀양 가 있는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 호동이를 구출해 오는 것이다. 호동이는 회색 털에 에메랄드 색 눈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하고 어쩌고저쩌고… 아무튼 최고인) 페르시안 고양이인데, 한 살 때 우리에게 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호동이를 처음 만났다. 우리 가족이 당시 키우고 있던 시츄 강아지 모모에게는 갑작스러운 새 남매가 생긴 샘이었고, 둘은 동갑내기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살지 않아서인지 서로를 어지간히 싫어했다. 십 년을 같이 살아도 한 번 싫은 건 끝까지 싫은 모양이다. 그러다 언니가 먼저 독립을 하며 모모를 데려갔고 호동이는 부모님과 함께 함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호동이가 그곳에서 딱히 불행했던 건 아니겠지만, 여하튼 부모님도 바쁘셔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깡촌이라 제일 가까운 동물 병원도 몇 시간을 가야 나왔다. 호동이는 이미 열 살이 넘은 노령묘였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 보지만 역시, 내가 외롭고 내가 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에 호동이를 좁아터진 원룸에 데려온 것이리라.
나는 호동이의, 호동이는 나의 반려 동물이 되어 갔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호동이가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애교가 많은지 전혀 몰랐다. 꾹꾹이를 12년 만에 처음 받아 봤다. 내 발소리가 들리면 문 앞으로 달려와 뭐하다 이제 오냐는 짜증을 쏟아냈다. 호동이가 현관에 나와 있지 않을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집안을 뒤졌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늘 어느 구석에선가 잠투정 가득한 이야오옹, 대답이 들려오곤 했다. 밤에는 밧줄 감긴 사다리를 단번에 딛고 침대로 사뿐히 올라와 머리맡에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겁이 많아 혼자서 잠도 못 자는 쫄보였던 나는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도 종종 컴컴한 어둠에 숨이 막혔다. 이젠 그럴 때마다 다급히 몸을 뻗으면 항상, 손 닿는 거리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손길이 닿으면 약속된 것처럼 늘 시작되는 고롱고롱 자장노래. 그 안정적인 리듬을 좇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가끔 언니 부부가 모모를 맡기고 가기도 했는데, 양 옆에 모모와 호동이를 끼고 있는 나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기분이었지만 모모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본래 집과 비교도 안되게 좁은 공간에서 오랜만에 본 앙숙과 머리를 맞대고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생전 처음 그런 모습을 본 나는 까무러치게 놀라 모모를 안고 엉엉 울며 동물병원으로 뛰어갔다. 나이가 많아 심장 약을 밤낮으로 달고 살았던 우리 모모. 다행히 당시에는 무사히 회복되었고 가장 사랑하는 언니 곁에서 무지개다리를 건넌 건 그로부터 약 3년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좁고 답답한 내 자취방 때문에 병세가 악화된 건 아닐까,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은 오래오래가시지 않는다.
호동이는 아직 건강하지만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감옥 같은 집에 가둬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