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직관, 영혼의 언어

이성이라는 마음의 좁은 감옥을 넘어서다

by 생명의 언어


마음(mind)은 감옥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면서 또한 그 무엇보다도 '나'를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 억압한다.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의 이름은, '이성', '논리', '합리', '생각', '상식', '개념'...... 그러한 것들이다. 나의 의식은 감옥 안에 갇혀 있는데, 감옥 안의 나는 간수들을 동경하며, 그들이 더욱 굳건하게 감옥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굳건히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살 집이라도 되는 양, 만족스러워한다. 나는 그 모습들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알고 있다. 그 자신은 정작 마음 안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이 갇힌 줄도 모른 채로, 온 세상을 감옥의 창살 너머로 바라보면서 '인식'하고, '분별'하며, '비판'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온통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마냥, 자기가 온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양, 그리 우쭐대는 것이다.


나의 모습이었다. 나의 에고(ego)가 어떠한 모양과 형태와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른 이들보다야 내 자신이 더 잘 알지 않겠는가. 이것은 앎에 대한 자랑이 아니다. 이제 서른 해를 넘긴 주제에 그토록이나 어리고, 어리석고, 오만한 나의 안쓰러운 자아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밤들을 지새고 함께하면서 느낀 바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집착한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것에 집착한다. 온 세상을 자기의 기준 아래에서 철저하게 분별하고, 제맘대로 자신과 타자와 세계를 재단하려고 든다. 정작 그 기준이 옳은지 틀린지, 옳다고 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지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로. 아, 남성성이여, 나의 오랜 죄성이여! 유감스럽게도 한때 내가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기에, 나는 '마음'이라는 감옥과, 그 감옥을 지키는 '이성'이라는 이름의 간수에 대해서, 나름대로 꽤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이 말씀에서 '육'은 단지 물질적인 몸, 그러니까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mind)과 자아(ego)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며, 오히려 직접적인 육체 그 자체보다는 보이지 않는 자아와 마음이라는 아성(我姓)이야말로 육 그 자체이다. 사람의 자아와 마음은 철저하게 무의식에 지배당하며, 그 무의식에는 인류 집단이 형성한 거대한 두려움, 공포, 불안의 어두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할 때, 사고할 때, 분별할 때, 소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마음의 작동 안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정교한 감옥 안에 갇힌 줄도 모르며, 그 상태에서는 심지어 "영이요 생명"인 말씀조차도 '생각'하고 '사고'하고 '분석'하여 머리로 이해하려고 한다. 아, 내가 고백컨대 나는 그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너무 잘 안다.


절대 다수의 신앙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며, 심지어 나 같은 일개 '평범한' 인간은 아무리 기도해봤자 절대로 응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리 믿는다. 그 부정적인 생각과 사고에 얽메인다. 마음이 일으키는 모든 것은 생각이다. '감정'은 없다. 분노, 슬픔, 두려움, 공포, 불안, 열등감, 죄의식, 그러한 것들은 언뜻 감정처럼 보이지만, 감정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오만함, 교만함'의 죄성의 발현이다. 사람의 마음이 일으키는 모든 현상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 안에 속해 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날 적에,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철저하게 가두고, 지배하고, 억압하고, "자율적이고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감시, 통제하도록 만드는지, 그 실태가 어떠한지를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자신이 안타까웠고, 또한 그와 같이 평생을 꿈 아닌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로 살아갈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 안에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마음과 자아로서 살아갈 때, 그는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태어난 적"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그 거대한 어두움에 갇혀서, 마침내는 이성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마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이성의 언어이며, 논리의 언어이며, 사유와 분석과 개념의 언어인 것이다. 마음의 언어인 것이다. 태어나서 오직 한 가지 언어밖에 듣지 못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전부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 하나님"조차도, 이성의 언어로서 이해하고 분석하고 알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라. 이성 그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성과 논리와 마음의 언어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마음 안에 갇혀서 살아갈 때, 거기에 생명은 없다. 살아 있지 못하다. 더 나아가서 자신이 살아 있지 못하다는 것조차도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죽기 직전까지 그리 인생을 산다. 이성은 도구이다. 그러나 도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유일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성의 언어가, "영혼의 언어"를 억압하고 가두고 통제한다.


나는 나의 과거를 안다. 그렇기에, 그리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롭고 허망한 것인지를 절절히 안다. "감옥에 갇혀본 자"만이, 감옥의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법이다. 한때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그 마음(mind)과 자아(ego)에 집착하고 또 집착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고 또 가로막는지를, 나는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이성의 언어에 안주하는 순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나는 간절하고도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를 증거하고 싶다.


"그 반대로 가라, 거기에는 길이 없다. 신의 음성은 오직 이성의 반대, 감성과 직관이라는 영혼의 언어로만 들을 수 있다. 마음의 맞은편, 마음의 너머에, 생명이 있다. 신성이 있다."


많은 형제들이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이어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던 그분의 말씀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분 안에 거할 적에,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요14:27) 평화가 임하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머리로만 이해할 뿐, 가슴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목격한 적이 없으니, 어두움이 당연한 줄로만 알며, 한평생 어두움 안에서만 갇힌 채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면 당연한 삶의 방식인 줄 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음성'은(나는 '음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분명히), 오직 영(Spirit)으로만 들을 수 있다. 마음은 너무도 낮고 열등하고 불완전한, 허망한 육일 뿐이어서, 마음을 통해서는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이 열릴 수가 없다. 나를 눈뜨게 하셨고, 나를 깨어나게 하셨으며, 나로 하여금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고, 절절히 사랑하며, 그분께서 걸어가신 길을 미천하게 흉내내어서라도 뒤따르고자 하는 나의 가난한 열망을 일으키셨던, 성령의 임재하심은 "사람의 언어"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말은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오직 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라는 표현 자체가 너무도 육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언어임을 알아야 한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의 영이 진리 '안에', '거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모든 음성들은 오직 감성과 직관으로만, 그나마 영혼의 언어를 마음의 수준에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단어는 오직 '감성'과 '직관'뿐인 것이다.


나는 너무도 간절하게, 절실하게, 이 하나를 증거하고 싶은 것이다. 이성이 아니다, 제발,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그분께서는 "머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성전" 삼으시는 곳(고전6:19-20), 그것은 나의 영혼이며, 영혼은 오직 가슴(heart)으로 인해서만 열리며, 오직 그 안에서만 모든 고귀하고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말씀들이 임하실 수 있는 것이다. 가슴을 열어야만 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평생을 머리만 쓰고 사느라, 가슴의 언어를, "생명의 언어"를 놓치고 산다. 도처에 아버지께서 임재해 계심을, 평범한 삶의 모든 순간마다 그들 모두를 주님께서 돌보고 계심을, 성령께서 어디에 계시고 어느 순간에 계시는지를, 모두 놓치고 산다. 눈을 뜨고도 눈 뜬 장님처럼 그리 산다.


머리가 비대하고 두꺼울수록, 아만과 아집과 교만에 취하게 되며,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이 "부유한" 자는 감옥이 더욱 크고 웅장하게 되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임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마침내 그 '이성'이, '논리'가, '마음'이...... 얼마나 허망하디 허망한 것인지를 절절히 체감하되, 마침내 낮아짐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된다.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 이슬 하나에 담긴 생명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것인지를 마침내 깨닫는다. 그는 눈을 뜬다. 꽃잎 하나에 담긴 그분의 "숨결"이, 우주 전체를 능히 채우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모든 생명으로 인하여 '감동'할 때, '기쁨'이 일어날 때, 그것이 마침내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님을, 나의 영이 그분을 영접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영혼의 언어"임을 깨닫게 된다.


그 하나의 깨달음이, "영혼의 감각"이 깨어남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나의 존재와 삶과 일상 전체를 바꿀 것이며, 나의 내면과 의식을 완전히 전환되게 만들 것이다.



신은 오직 "영혼의 언어"로만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신의 음성은 오직 "감성과 직관"으로만 영접할 수 있다. 그분의 실재하심과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내가 느끼고 교감하고 받아들이는 그 모든 과정들은 오직 머리가 아닌 가슴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마음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볼 때, 마침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곳에, 모든 순간에"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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