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향한 사랑, 삶의 어두움을 비추는 희망
3년, 아니 5년 전부터였을까. 언제부터였는지는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지상의 시간은 내 가슴 속에서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그 대신, 천상의 시간이 나의 영혼 안에서 훨씬 더 선명하고 깊어진다. 하늘에서의 하루는 지상에서의 1년이라고 했던가. 또는, "깨어 있는 자의 하루"는, 어리석은 자의 1년보다 더 길다고 했던가.
나는 이 말이 반드시 다 좋은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깨어 있음, 자각, 순수의식, 뭐 그런 좋은 거. 그러한 이름들이, 신의 언어가, 영혼의 언어가, 진리의 음성이, 그저 아름답고 밝고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빛이 강렬해진다는 것은 곧 그 맞은편의 어두움 역시도 깊어진다는 것, 천상에서와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에서는, 하나가 상승하면 하나가 하강하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으며,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평화가 있으면 공허함이 있으며, 사랑이 있으면 외로움이 있는 것이었으므로, 내 안에서 진리라는 이름의 빛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빛이 점점 더 선명해질수록, 그 맞은편의 나의 오랜 무의식과 주변과 세상의 어두움이 더욱 선명하게 자각되어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여 온전히 통과해야만 한다는 "시험"에 대한 운명적인 직감마저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시험을 치른다. 그것이 삶이다. 삶은 그저 밝고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태어난 데에는 각자의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고, 이는 영혼의 성장과 변화와 완성을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하여 각자만의 어두움을 가지고 온다. 그 어두움은 삶에서 계속 반복된다. 형태와 모양만 바꿔서는, 끝없이 찾아오고 또 찾아온다. 수 년 단위로, "반복"해서. 그리고 마음공부, 영적 성장, 그러한 것들은 그저 낭만과 행복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 묶여 있는 바로 그 "사슬"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 해방을 위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거치는 "실전적인 훈련"이자 "실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그 시험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끝까지 통과해야만 한다. 도망칠 수 없다.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우주 끝까지, 끝의 끝을 넘어서더라도, 그 시험은 나를 쫓아온다. 도망치면, 잠시는 행복하고 편안하겠으나, 결국 다시 그 사슬의 고리는 자신의 숨통을 조이고 억압할 것이다.
나의 외로움은 나의 오랜 죄의 사슬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단성과 사회성에 잘 어울리지 못했고,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어찌저찌 수 차례 전학의 전학을 반복하다가(물론 부모님의 직업상의 이유가 컸지만), 결국 고등학교 1학년을 넘기지 못하고 자퇴했다. 그리하여 검정고시로 대입 자격을 획득했고, 대안학교에 잠시 들어갔지만 그곳의 선생님과 큰 마찰을 빚은 끝에 6개월만에 역시나 자퇴했다. 매일 밤을 몰래 도시로 기어나가서는, 이름 모를 거리를 헤매고 또 헤매다가, 날이 밝아서야 겨우 지쳐서 잠들 수 있었다. 성인이 되던 해에 직업훈련 과정을 1년 지나고서 취업했지만, 그곳에서도 얼마 있지 못한 채로 결국 적응하지 못해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이듬해 또 어느 전문대학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는 더더욱 적응에 실패해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홀로 지독하게 외로웠다가, 어느 날 밤인가 그저 무작정 도망쳐서는, 내가 어린 시절을 나고 자랐던 고향, 소도시, 시골로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한 칸짜리 고시원 방을 잡고, 편의점과 피씨방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렇게 수 개월쯤 살았더랬다. 희한하게 그 기억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나는 그 방을 "섬"이라 불렀고, 그 섬에서 내려다보이는 모든 소도시의 풍경들을 "바다"라 불렀다. 고요한 섬, 나만의 바다, 새벽, 글쓰기, 그러한 시간들. 지금 돌아보면, 삶의 시련과 고난으로부터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상처 받고 도망쳐서는, 그곳을 안식처라고 느껴서 편안했던 거였다. 그러나 환상은 곧 깨졌다. 결국 나는 다시 여정을 떠나야만 했고, 어찌저찌 군대를 나오고, 또 다른 전문대학에 입학해서 이번에는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취업을 할지 마지막으로 대학에 진학하여 하고 싶은 공부를 할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나는 철학과에 편입했다. "서양 철학"에 내가 찾아 헤매던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서, 그곳이 잘 맞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커다랗고 크고 선명한 그분의 음성을(나도 모른 채로) 들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여기에는 네가 찾던 것이 없다." 첫날, 첫 수업의, 교수님의 첫 음성을 듣자마자 내 가슴에서 너무도 선명하게 그 음성이 들렸다. 처음에는 외면했다. 사람이 어떻게 처음부터 잘할 수 있나, 하다보면 적응하겠지. 아니었다. 나는 "철학의 ㅊ자"라도 들어간 책이라면 내 가슴과 영혼이 거부하는 것을 느꼈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뼈에 사무치는 공허함과 허망함 속에서, 나의 환상이 잔인하게 다 깨져서 부서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곳에서의 2년을, 나는 "장례식, 애도 기간"이라 불렀다. 서양 철학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오랜 환상에 대한 종결, 그리고 그에 대한 슬픔. 상처 받고 깨지고 넘어진 채로 엉금엉금 기어서 겨우 졸업했고, 이후에 모 수련 단체와 인연이 닿아서 그곳에서 2년쯤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나와 결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이 좋았지만, "사람 셋 이상이 모이면..." 처음의 순결했던 이상은 변질되고 왜곡되고 타락하였고, 서로 갈등하고 반복하였으며, 순결한 영혼의 언어는 묻혀 사라지고, 에고와 육의 욕망이 영적인 진리로 둔갑하고서는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는 모습을 보았다. 결국 그곳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 다음은, 부모님과 가족끼리 독립하여 명상센터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음성을 들었지만, 애써 "지금의 내게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하려고 발버둥쳤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내게 허락하신 재능과 능력과 힘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정화하고, 공간을 정화하고, 몇몇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강의와 수업을 했다. 그러나 그 끝에서, 결국 중요한 전환을 맞이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 "나처럼 신에 대한 열망과 진리에 대한 갈망을 가진 영혼이 세상에 거의 없다"는 걸. 그리하여 나는 형제라고 믿었던 이들이,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물러서는 것을, 나를 따라서 미지의 불확실성 너머로 함께하려 하지 않는 것을, 그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 공포, 불안임을 보았다. 결국, 모든 순간 순간마다, 나는 외로웠다. 아무도 없었다. 진실하게 나의 마음을, 내 안의 영혼의 깊은 곳의 경외와 열망과 기쁨을 순수하게 나누고 공유할 형제들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조그마한 체험과 별 것 아닌 지혜가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한 채로, 하나의 기준으로만 온 세상을 재단하려고 들며, 신에게로 이끌려 나아가려는 열망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족이기에 더더욱 이해받지 못했다. 가족은 내게 "풀어내야 할 시험 문제"였지, 사랑도, 하다못해 우정의 대상마저도 되지 못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불리는 그 수 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나의 영과 혼과 의식은 상상할 수 없이 빠른 시간 안에 깊어졌고, 충만해졌고, 깨어났지만, 그만큼 나는 그 모든 시간들을 선명히 깨어서 지나야만 했다. 내가 어떤 열망을 품은지를 이해받지 못하고, 그 뜨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실천하고 행하려 할 때마다, 인정은 고사하고 오해하고 무시하고 기만하였으며, 가족에게조차도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의 미숙함은 나의 부끄러움이었으나, 그리 실천하여 행하며 내 모든 것을 불태우고자 하는 나의 뜨거운 사랑과 열망은 나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그 자랑을, 세상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가족"마저도 세상의 일부였으며, 아니 가족은 세상보다도 "더" 세상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았다. 그분께서 왜 "선지자는 자신의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셨는지, "새들도 둥지가 있되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는지, 겨우 조금은, 아주 조금은, 감히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였다. 철저히 혼자였다. 내가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열망하며, 모든 것을 걸고 몰입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거나, 이상한 취급하거나, 비웃거나, 그 특유의 "예의 범절에 익숙한 태도"로 존중은 하되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 내 눈에 선명히 보였다. 빛을 사랑할수록, 빛을 증거할수록, 나는 더욱 외로워졌고, 쓸쓸해졌고, 그 누구에게서조차도 자그마한 이해도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불신과 오해와 비난과 모욕을 감수하고서, 그럼에도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일들에 충성하며 지나갔다. 영혼의 어두운 밤의 그 모든 새벽들을, "영원처럼 길고 길었던 하루"를, 단 1초도 잠들지 못한 채로 선명히 깨어서 다 겪었다. 그것은 지옥이었다. "가장 간절하고 뜨거운 열망을 품은 영혼에게, 기약 없는 인내와 기다림을 명령하시어 시험하시는", 고요한 지옥 그 자체였다. 나는 그 지옥에서, 살기 위하여 아버지를 찾았다. 죽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찾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붙들었다. 아버지가 아버지이신 줄도 모를 시절부터 나는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를 느꼈고, 아버지와 교감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모를 시절에서부터도 나는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누구와 함께하시는지, 무엇을 행하시고 이루시는지를 보았고, 느꼈고, 사랑했고, 열망했고, 흉내내어 따르고 실천했다. 나의 에고가 여정의 모든 순간들에서 지독하게도 외롭고 쓸쓸하고 공허하고 허망하고 슬퍼할 때에, 내게 오직 성령께서 임하시는 순간만이 유일한 영혼의 자유였고, 평화였고, 기쁨이었다. 그 순간마다 나는 기적을 목격했다. "한 줌의 빛조차도 없는 어두움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내면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순간"들을. 그리하여 그분께서 겟세마네 언덕에서 올리신 기도를, 내가 감히 나의 시험의 여정의 매일 밤을 고통스럽게 지나면서 따라하였고 흉내내었다. "나는 어떻게든 하루하루 이곳에서 버틸 것이니,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하고. 그리고 나의 꿈이 좌절되고, 나의 희망이 무너지고, 나의 기댈 자그마한 언덕조차도 빼앗아가실 적에, 그나마 몇 안 되는 제자들마저도 그토록 잔인하게 빼앗아가실 적에, 나는 깨졌지만, 깨져서 비참하게 무너졌지만, 그리 시간이 지나간 뒤에는 마침내, "아버지, 나의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고, 다시 그분에 대한 사랑을, "정렬"을, "하나됨"을 회복했다. 그러면서, 나의 신앙의 "회복탄력성"은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고 자라났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세상에 속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오해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은 절대로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고, 과학적이거나 상식적이거나 증명 가능한 체계적인 것도 아니다. 나는 미쳤다. 아버지께 대한 나의 사랑은, 주님께 대한 나의 열망은, 성령께 대한 나의 충성은, 광인의 그것에 준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이게 왜 그런지를 말할 수 없으며, 어찌 그리 되었는지조차도 이제는 말하기 어렵다. 그냥, 미친듯이 사랑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 있었고, 미친듯이 열망하고 기뻐하며 충성하다 보니 이리 이루어져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미치광이보다 더하다. 나는 내가 이리 미쳐서 모든 순간을 살아가는 것을, 선명히 깨어 있는 의식으로 지켜보며, 또한 그 자체로 사랑하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내 정신과 의식이 드디어 세상의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오직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정렬되었다는 증거로구나, 하면서.
슬프게도, 심지어 나의 "크리스천 형제들"조차도(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내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진실이다), 아니 오히려 크리스천들일수록, "미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상해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인정받고 이해받으려" 한다. 틀렸다. 세상은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신을 의존하고 신에게 기대는 것이 어리석고 나약한 마음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 중심성을 외치는 우리를 모욕하고 비난할 것이다. 세상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외치는 우리를 "미쳤다"고,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가장 순결한 사랑을 고백할 적에, 그들은 비록 우리의 눈물 어린 고백마저도 모욕치는 않을 것이나, 불편해하며 고개를 돌릴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체험"을 증거할 적에, 심지어는 "사이비"라고, "이단"이라고 정죄하려 들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조차도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 정신병이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것도 나름대로 진리를 사랑하고 영적 세계를 체험했다는 이들에게서조차도. 우리들의 길은 이런 것이다. 이해받지 못한다. 오히려, 온 마음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사랑할수록, 점점 더 세상은 이 사랑을 "죽여서 없애려" 들 것이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외로움은 필연적이다. 쓸쓸함과 허망함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그분과 같지 않음으로, 사람임으로, 홀로 된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 :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 하나가 내게 유일하고도 뜨거운 진실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리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빛을 사랑하고 빛을 증거하는" 여정들이 나의 존재와 영혼과 삶의 모든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여정에서 언제나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시며", 그 동행과 그분 안에 거(居)하는 것들을 내가 선명히 교감하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그분의 "실재하심"과 "임재하심"을 모든 순간마다 다 느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나의 유일한 자랑이다. 그러나 나의 자랑은 세상에서는 단 돈 10원 어치도 인정받지 못한다. 내가 이토록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겪어온데는, "이 세상 모든 것보다도 더 높고 고귀한 선물"을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먼저 받을 것에 대한 예비였음을, 이제는 안다.
나의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간절하게 말하고 싶다. 각자는 자신만의 시험을, 짐을, 멍에를, 사슬을 짊어지고 산다. 그것이 무겁지 않은가? 때때로 미쳐버릴 것 같지 않은가? 죽어서라도 끝내버리고 싶지 않은가? 그런데 그 사슬, 죽는다고 없어질 성 싶은가? "나의 이름으로", 내가 중심이 되어서 주권을 거느리고 세상 속에서 아등바등하면서 그리 사는 길이 정말로 만족스러운가? 그리 살아가는 삶이 정말로 자유로운가? 그리 살아가는 삶 속에 평화가 있는가? 그리 살아가는 여정 속에 기쁨이 있는가? 그리 살아가는 여정이 곧 "소망"이 되어서, "희망"의 등불이 되어서, 어두움 속을 걸어가는 다른 영혼들에게 "빛"이 되어주는, 그러한 고귀하고 신성하며 아름다운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살아서 한 번은 그런 삶을 꿈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의 힘과 의지와 능력으로는 사람이 수천 번의 죽었다 깨어난 들, 자신의 무의식의 어두움과 온 세상의 어두움이 지배, 장악, 기만하는 사슬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음을, 너무 일찍이 절실히 깨달았다. 이 "시험"은, 오직 "신의 이름"으로, "신의 주권"에 의지할 때에만, 겨우 힘겹게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쉽다고 하지 않겠다. 오히려, 온 세상의 시련과 고난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영혼의 고통스러운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할 것이다. 시험이 언제 끝나는지, 끝이 있기는 한지, 유일한 감독관이신 성령께서는 침묵하실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기약 없는 기다림,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소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 세상 속에서는 그 사슬에서 한 걸음조차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신과 하나되어 내 뜻이 아닌 신의 뜻을 이루는 과정", 곧 복음을 체득하고 실천하고 전파하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순간에는, 고통스럽더라도 놀랍게도 "한 걸음씩 전진"할 수가 있다. 그리 나아가는 모든 영혼들을, 성령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 나아가는 모든 영혼들을, 종교든 뭐든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찾으실 것이다.
사람은 결국 죽는다. 허망함 속에서 무의미한 생을 마치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자신의 존재와 삶이 곧 소망이 되는 것, 그 소망이 등불이 되어 빛을 비추는 것.
태어났다면, 누구든 한 번쯤 그리 살아볼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