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고 영원한 중심을 드러내어 밝히다
오늘날, 3대 종교(가톨릭, 개신교, 불교) 중에서 개신교가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결과가 있다. 나는 이 사실에 무척이나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낀다. 모든 형제들이 다 알고 있겠지만, 개신교의 모태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종교개혁의 기치가 무엇이었는가? 교회의 부정과 부패, 타락 등을 혁파하고자 함도 있었겠지만, 나는 결국에는 "진리의 순결성"을 회복하고자 함이었다고 믿는다. 마르틴 루터는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신(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를 주장하였고, 또한 "그리스도 중심성",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원칙을 회복하였다. 나머지 모든 종교개혁 및 복음주의의 원칙들은 이 하나의 중심축, 곧 "만인제사장설"과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비롯한 세부적인 서술들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가? "전 인류의 구원", 곧 복음(福音) 두 글자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소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개신교"라는 이 현상 자체가,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매우 슬프고도 아픈 모순으로 느낀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기쁜 소식(복음)이 있다!"고 하였는데, 왜 정작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거부되고 있으며 심지어 비난을 받고 있는가? 그 원인이 무엇에 있는가? 진리의 중심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음이 첫째요, 또한 그 절대적이고 유일한 하나의 진리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부수적인 나머지들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였음이 둘째다. 결국, "배타성"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들끼리만 구원받는다"는, 인류의 원죄 그 자체 말이다. 편을 가르고, 적과 아군을 나누고, 적을 죽이되 아군이 이익을 차지하려는 그 오랜 인류의 죄성이, 결국에는 진리와 복음을 말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까지 기어코 폐단을 끼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원인을 규명하거나 따지는 등의 일은, 내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다. 아마도 다른 많은 형제들이 이 역할을 이어받고 있을 것이므로, 나는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 배타성으로 인하여 희생된, 복음의 본래의 의미와 진실과 가치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는 것, 그리하여 절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현대인의 눈높이에서 이해 가능하고 받아들여지기 친숙한 언어를 활용하여, 그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온전히 설명하는 것,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일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기쁜 소식"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해한다. 이것은 "죄책감을 느끼라"는 주문이 아니다. "반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엄밀히 말하자면 과정이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이 말을 외친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죄책감에 빠져들기를 원해서가 아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회개를 통하여 "기뻐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기뻐하는가? 바로 그 다음 문장에 나오지 않는가, "하늘나라(구원)가 가까이 왔다"고. 이것이 복음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첫번째 오해이다. 복음은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접할 적에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문제이다. 명백히 "잘못" 전파한 것이다. 복음은 죄인을 정죄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의 방식이다(죄를 심판하고 벌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인가? 이미 모든 형제들이 다 알고 있을 만한 유명한 말씀으로 증거되고 있지 않은가 :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아흔아홉의 의인으로 인한 것보다 더 기뻐한다"(눅15:7)고. 오히려 이렇게 보면, "회개(크게 뉘우치고 반성함)"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으니, 더 크게 기뻐해야 하지 않는가? 회개할 것이 없는 걸 아쉬워해야 할 일이지(물론, 그렇다고 회개할 죄를 부러 저지르라는 소리는 아니다, 원래도 인간에게 회개는 어려운 바, 죄가 많아지면 회개는 끔찍하게 어려워질 것이다), 죄가 많다고, 어두움이 많다고, 두려움에 떨면서 복음을 접하는 것은 명백하게 "이상 현상"인 것이다.
결국, 이는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인류의 오랜 죄성, 곧 열등감과 죄의식으로 인한 이상 현상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만약 "진실로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할" 경우, 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인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특권적인" 평화와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 채로, 그저 교리와 형식으로만, 머리로만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죄성에 지배당하는 고로, "그렇게 하면 너는 구원 못 받는다"는 식의 잘못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진다. 그 예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살아서 신과 하나된" 영혼은, 신 안에 거하는 그 상태의 평화와 기쁨이 너무도 크므로, "신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신의 마음(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불경스럽지만, 여러분께서 용서하시기 바란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히려 "네 안에 죄와 어두움이 많다면, 회개할 것이 더 많아서, 너로 인하여 하나님은 더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너는 딱 하나, 회개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나보다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그분께서 더 크게 기뻐하실 것"임을, 곧 "성령의 음성"을, 곧바로 듣고 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흘러나온 "신의 언어"는, 항상 예외 없이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여는 강력한 힘(권세)을 거느리게 된다. 이해할 수 있는가? 개신교가 복음을 강제하다가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곧 "성령으로 인하여 전도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 하나뿐이다. 잘못된 방식이었기에, "하나되지 못했기에", 성령께서 침묵하신 것뿐이다. 결국, 복음 전파가 우선이 아니라 그 복음이 본인 자신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 곧 "역사하심"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결국, 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더 정확히는 "나(ego)"의 주권이 완전히 죽고, 내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정당한 통치를 시작하심으로써,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하였던 바울의 증언을 나의 존재 안에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 주권이 곧 그분께로 넘어가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없어지고, 오직 통로만 남는다. 통로가 되어, 오직 "나를 통해서" 그분께서 드러나신다. 이때, 통로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통로의 주(主)이신 분께서 "의롭다"하시면, 놀랍게도 통로는 "이해하지 못한 채" 평화와 기쁨을 느낀다. 이것이 참된 크리스천들이 시련과 고난 한가운데에서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는 강력한 초월적인 힘의 비밀이다. 이때에는, 통로가 일하는 것이 아니요, 그분께서 일하시는 것이기에, 무엇이든 가능하다. 전도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먼저 내게로 와서 "진리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그때, 나는 "복음을 전하라"는 그분의 허락이 떨어졌음에 크게 기뻐하며, 간절하고도 절실한 마음으로, 그러나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자기를 낮추는 "복음주의의 심장"으로,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 "내가 죄인이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 그런 나조차도 구원을 받았을진대, 너는 능히 가능하며, 오히려 나보다 더 나을 것이다!"하고서. 자기를 낮추고 타자를 높이는 것은, 죄성에 갇힌 인간 존재의 구조 안에서는 작동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설령 하더라도, "위장"이요 "흉내"에 불과할 뿐, 진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래의 복음 전파의 올바른 형태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 하나, 내 자신이 먼저 "통로"가 되어야 한다. 즉, "내 안에서 먼저 역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참된 크리스천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복음 전파는 그 다음 일이다. 임재와 역사가 우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결국 복음 앞에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거부하고", "비난"하고, 마침내 복음을 말하는 자를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이려고"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복음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복음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 그러니까 구원의 자격과 기준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가 구원을 말했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 "구원받은 자가 복음에 대하여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전자보다 후자에게 죄가 더 크다 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께서 감히 지켜보고 계시는 고로, 그러한 죄를 범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진짜 기준"을 말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복음의 본질은 "구원"에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정죄나 심판에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세상은 오직 둘로 나뉘며 :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나머지"로 나뉜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곧 심판이다("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기 떄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외려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니,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3:17-18). 즉, 별도의 심판은 없다. "구원받지 못한 상태" 그 자체가 곧 심판당한 상태이다. 사람은 죄성에 갇힌 존재이므로, 사람의 생각의 흐름은 빛보다 어두움에 초점을 두게 되어 있다. 즉, "내 안의 어두움을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밝아지겠지"이다. "내 안에 심판당할 죄목들을 하나씩 회개하다 보면 언젠가 구원에 이르겠지"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육의 사고방식이지, 영의 언어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따라서 "회개", 한 조건만 성사된다면, 나머지 모든 어두움들은 "즉시, 한 번에" 해결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므로, 초점 자체를 심판이 아닌 "구원"에 맞춰야 한다. 이것이 진짜 기준의 첫번째 원칙이다. 어두움을 어찌하려고 하지 마라. 어두움은 거기 그대로 두되, 오직 "빛"에만 몰입해라. 빛을 구해라. 빛을 찾아라. 빛을 탐구해라. 빛을 향해 나아가라.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자는 이미 그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누구라도" 다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으며, 그분의 말씀 어디를 찾아봐도 "특정한 종교, 교단, 소속, 형식, 계파" 따위를 말씀하신 적은 없다. "누구라도 다", "누구에게라도 다"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두번째 오해이다. 즉, 나머지 육적인 조건들은 중요하기는 하되, 최우선이 아닌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 그리고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그 최초이자 최후의 기준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이 앞에서 나머지 모든 부수적인 조건들은 그 허세가 벗겨진다. 이 말은즉,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하면, 나머지 모든 것들을 면제받는 것"이며, 또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다 충족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만큼 이 하나가 중요하며, 이 하나는 "종교, 교단, 소속, 계파 등 육적인 모든 기준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것, 이다. 이것이 진짜 기준의 두번째 원칙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곧 세번째가 있다. 항상 "삼(3)"은 신성하다. 숫자는 본래 문화상징에 가깝지만, 1, 2, 3은 원형상징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 3은 신성을 상징하는 인류 보편의 원형이다. 세번째는 무엇인가?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에 이른다, 는 것이다(요1:12). 이 지점에서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나큰 오해를 하게 될 것이다. 소위 "예수님 믿어야만 천국 가며, 예수님 안 믿으면 천국 못 간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말은 "겉보기에만 맞는 말"이다. 그 말을 행하는 자가 곧 "본질"을 온전히 이해했더라면, 불신하는 자 앞에서 진짜 복음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실한 성령의 언어로 달리 말하였을 것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가? 오늘날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의심하고 부정하고 비난하고 비웃는 이 이름, 곧 "그리스도"란 무엇이며, 이를 믿는다는 것은 대관절 무엇인가? 특정한 한 개인을 믿으라는 소리인가? 이에 대해서 하나씩 접근해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으며,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이 오직 그로 인하여 창조되었다(요1:1-3). 따라서,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 안에 계신다."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것이 그분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히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셨다(요14:10-11). 따라서 "나와 - 그리스도와 - 하나님이 하나"될 길은 이미 내 안에 존재한다(요14:26, 14:20). 셋째,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다"(요14:6)고 하셨으되, "나를 믿으라"에서의 나(I AM)는 예수님의 인성이 아닌 그분의 신성을 의미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생명의 떡"(요6:35)이라 하신 말씀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이해하면, 진짜로 그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세상의 빛"(요8:12)이라 하신 말씀 역시도, "인간의 육신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또 다른 말씀들도, "내가 문이다"(요10:9)는 것도, 예수님의 육신을 우리가 칼로 찢어서 열고 들어갈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육신이 아니라 그분이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신"(요10:38) 그분의 신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만약 예수님의 육신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원의 기준"이었더라면, 그분 탄생 이전의 인류와 그분 사후의 인류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논리적 결론이 도출되며, 이는 "그 이름을 믿는 누구라도..."의 말씀에 어긋나게 된다. 이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태초부터 모든 존재 안에 계셨으며", 복음, 곧 "구원의 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 안에(또는 모든 존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신성"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1) 보편적이고, 2) 내재적이며, 3) 초월적인 것이다. 이것은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원형적이고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신성의 근원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안의 신성(그리스도)을 "믿을" 수 있는가? 이때, "믿음"이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나의 영(본질)이 그리스도(신성)와 연결되어 하나되는 것"이다. 입으로만 믿는다, 믿는다 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마7:21). 믿음은 곧 "하나됨"이다. 그분은 "자신을 통하여 너희 모두가 아버지와 하나될 것"을 주문하셨다(요14:20, 요17:21). 따라서 믿음은 곧 "하나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가? 일단, 신과 "소통"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통은 기도다. 이에 대해서 먼저, 예수님은 "오직 영과 진리로만 하나님께 예배하라"(요4:23)고 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와 말과 행동으로 하는 외적인 것들은 전부 다 기도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영의 기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이른 말씀을 보면 답이 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38)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함께하리라."(요14:23) 즉, "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신은 거하시며,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됨은 곧 사랑이다. "우리 안에 거하는 신성(그리스도)을 믿음(사랑)으로써, 신(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곧 "나의 영(Spirit)이 그분의 신성과 매 순간 교감하고,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히11:1)이지, 머리로만, 입으로만, 행동으로만 "믿는다, 믿는다"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믿으면 언젠가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설명은 오직 철저히 "말씀"에 근거하였고,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에만 철저히 근거하였다. 이 말씀 어디에도 "특정 종교, 교단, 교리, 형식, 계파" 등의 육적이고 외적인 조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이 세상 누구라도 곧 그의 안에서 그의 영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의 영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중보자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 그것이 바로 "내 안의 신성(神性)"인 것이며, 이 신성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원형적인 빛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 빛(신성)을 통해서만" 신과 하나될 수 있으며, 내면의 빛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을 통해서도 결코 구원(하나됨)에 이를 수 없다, 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성"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곧 복음, 그러니까 "기쁜 소식"의 진정한 실체이다. 여기 어디에도 복음이 "특정 종교만의 배타적인 소유"라는 내용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언하신 말씀을 부정하는 자가, 감히 자기를 크리스천이라 칭할 자격이 있는가? 철저히 그분의 말씀으로만 논증하여 이끌어낸 결론만으로도,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열린" 보편적인 진리인 것이다.
다만, "진심으로 자신의 영혼 전체가 신을 사랑하고, 신과 사랑에 빠져야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보편적 복음주의의 최후의 마지노선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지어 크리스천들마저도,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존재 전체로 뜨겁게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형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형식적으로 예배할 뿐,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모든 순간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성령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그러한 "기쁜 삶"을 살지 않는다. 이것이 원인이다. "복음이 널리 전파되지 않는" 원인, 그리고 "복음을 말하는 개신교가 왜 정작 복음의 대상인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지"의 원인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분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줄은 알겠다"(요5:41-42)고 하셨다. 그리고 이는 더욱이 심화되어 오늘날에는 심지어 그분의 이름을 믿는 "제자들"마저도 절대 다수가 그저 "주여 주여" 하면서 입으로만 신앙을 외치고 있다. 정작 자기 안에서 복음이 이루어지지도 않은 주제에 감히 "성령보다 더 높아져서" 자기 언어로 복음을 주장하고 다니니, 온 세상의 적(敵)이 되었다.
"기쁜 소식"은, 곧 "신을 사랑하는 영혼"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 한 물음을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끊임없이 돌아봐야 할, 최후의 진실(Truth)을.
"나는 진실로 신을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