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성과 성육신의 교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by 생명의 언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 (요14:6)


유감스럽게도 절대 다수의 대중들은 진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은 불교는 "자비로운" 종교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종교라고 쉽게들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주워들은 단편적인 지식과 이론과 개념들을 얼추 취합하고 얼개를 맞춰서는, 그것이 전부인 양, 손쉽게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재단하고 심판한다. 그것은 곧 무수히 많은 영혼들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고 쌓아왔던 기독교의 역사 전체보다도, 고작해야 몇 마디 주워들은 것이 전부인 "나"가 더 높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원죄, 곧 교만함과 오만함과 욕망의 죄성으로 인한 것이되, 이는 정죄와 심판의 대상이 아니요, 오직 무지와 어리석음의 대상이니,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일찍이 하늘의 모든 권세를 누리는 분께서 말씀하셨다("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의 죄를 모르나이다." 눅23:24).


나는 이번에 확실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의 최후의 마지노선은 무엇인가? 끝까지 반항하고 저항하는 죄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억울함"이다. 내가 억울하다, 내가 이리도 목숨을 걸고서 진리를 설하고, 빛을 증거하고, 자신을 다 희생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오직 이리도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왔거든, 저들은 어찌하여 저리도 가볍게 함부로 입을 놀려댄단 말인가...... 하는, 그 억울함과 치욕이야말로, 에고(ego)의 최후의 목숨이며, 이것마저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하여 못할 것이 없는", 진정한 순종이 완성되는 지점일 것이다. 형제들에게 묻고자 한다. 억울한가? 기독교를 온 세상이 오해하고 비난하고 모욕하고 침뱉고 비웃는 것이 억울한가? 그리하여 그들에게 항변하고, 비판하고, 똑같이 비난하고, 비웃고, 오직 크리스천들만이 아는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영광"에 취하고자 하는가?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기독교의 왕"께서는 이미 친히 모범을 보이셨다 : 감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마저도 비웃고 모욕하고 침뱉는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마저도,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도 용서하셨다고, 용서를 청하셨다고.


우리들이 억울함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의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성육신의 고귀한 진리로써 세상에 오신 그분께서야 죄로부터 자유로우셨을지언정, 우리들은 한낱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웃음당하면 눈물 흘리고, 모욕당하면 눈물 흘리며, 억울함을 당할 때는 좌절하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의지(Will)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매, 그분께서 걸어가신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길"을 흉내내고 모방하여 끝끝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증거하기를 열망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길을 사랑하여 걷기를 원하는가. 억울함과 모함 가운데에서, 우리들의 슬픔과 아픔과 눈물을 가슴에 품고, 그럼에도 가장 낮고 가난하고 어두운 곳에서, "기어코" 남들의 짐을 내가 대신 지겠노라고, 저들의 죄를 내가 대신 처벌받겠노라고, 나를 대신 채찍질하시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리 기도할 수 있는가. 그 마음, 온 세상이 다 모를지언정, "오직 단 한 분"만은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하늘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거느리신 분께서는 우리들의 그 마음을 사랑하실 것이다. 기뻐하실 것이다.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치 아니한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 하나로 인하여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 그것이 우리 형제들의 가장 순결하고도 애달픈 초심, 첫사랑 아니었는가. 세상이 이토록 어두울진대, 갈수록 더 어두워질진대, 오직 이 마음이 앞으로 더욱 귀중하고도 중요함을, 익히 알지 않는가.


이 가난한 영혼이 감히 말하노니, 그분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그토록 고통스럽고 무겁고 무서운 십자가를 짊어지시면서도, 그분을 비웃고, 모욕하고 침뱉은 저 어리석은 대중들을 향하여 단 한 번도 정죄치 않으셨다. 이유는 간단하다 : 그들은 무지하였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께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성령께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자를 벌하지 않는 것은 세속에서도 당연한 일일진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명심하라. "우리 형제들은 모르지 않다." 우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누구를 영접하여야 하는지, 누구의 이름을 경배하여야 하는지, "왜" 그분의 의지를 내 목숨보다 중히 여겨야 하는지, 그리하여 무엇을 어떻게 증거하고 이루고자 하는지를, 다 안다. 맹세컨대, 그분께서는 무지한 자 천 명이 죄 짓는 것보다도, "아는 자 한 명이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하여, 더욱 죄가 크다 하실 분이다.


그러므로 나는 쓰기를 멈출 수 없다. 이리 나아가다가, 언젠가 기어코 크게 모욕당하고 비난당하고 손가락질 받을 것임을, 세상으로부터 공격당하고 또한 "크리스천 형제들"로부터도 공격당할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감히 "그분께 직접 들은 진리"를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는 자가 침묵하는 것은 더 큰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무엇을 증거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진리를 알게 하는 것", 이것은 교회의 역할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 주권이 계신 일"이다. 사람이 무지한 자에게 "이것이 고귀하다, 저것이 신성하다!"고 하여, 그들이 진리를 영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 "증거"이다. 그리고 그 증거는 지적이고 이론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들의 진실함과 진정성에서 비롯한 "고백"에서 근거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은 신앙의 길을 오늘날의 형제들보다도 더욱 비교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걸어가셨던 선배들의 영을 익히 본다. "내가 죄수 중에 괴수였다"고 증거하였던, 그의 영에 대하여 우리가 모른다 하지 않지 않은가. 그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칭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죄수 중의 괴물'이라고 칭했다. 그리하여 그가 그의 손으로 수많은 주님의 형제들과 제자들을 피 흘리게 하고, 목을 자르고, 고문하였던 그 죄를,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외면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담대히 그 십자가를 평생에 걸쳐서 졌다. 평생에 걸쳐서, "보이지 않는" 채찍을 맞고 또 맞았다. 그리하여 그에게 마침내 죽음은 안식이었을 것이다. 살아서 그분을 사랑하고 열망하고 충성하여 따르는 길이 매 순간 "채찍을 맞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곧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며,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이 역사가 되어 이루어진 영혼은 곧 "자기가 죽고,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며, 이때에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곧 "통로", 그분께 쓰임받는 통로가 된다. 그 순간, 그를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한다. 그가 침묵하고, 그를 통하여 성령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내가 냉혈한이었노라"고, "수백 명이 죽든 안 죽든 그 따위 뉴스로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이 없는" 놈이라고, 그런 내가 그분과 동행하는 여정에서 수없이 울고 또 울었노라고, 이제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노라고, 너무도 사랑하여, 나의 "크리스천 형제들"을 애타게 사랑하면서도, 정작 그분께서 내게만 허락하신 길을 위하여 교회 바깥에 설 수밖에 없음을, 나 자신을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이 아픔을, 오직 그분께 대한 나의 경외와 열망과 기쁨과 충성과 사랑으로 인해서 받아들이노라고.


나는 외치고 또 외친다. 세상이 오해하는 "하나님"의 언어로, 온 세상이 비난하는 "그리스도"의 언어로, 대중들이 비웃고 무시하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신의 언어"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류의 영성 그 자체를 회복하는 길고 지난한 길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이리 걸어간다. 물론 지상에서는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완전하지 않으며, 이로 인하여 각자의 입장과 계파와 관점의 차이가 있으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첫사랑"의 씨앗은 다 동일한 것이 아닌가.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이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에 있어서, 그 역사하심에 있어서, 미천하게나마 도구로써 쓰임받고자 함이, 우리들의 초심 아닌가.


그리 외칠 적에...... 마침내 오해하던 자는 이해할 것이고, 비웃던 자는 비웃음을 멈출 것이며, 모욕하던 자는 진심을 알아줄 것이고, 모함하던 자는 우리들의 눈물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 것이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아버지께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들의 희생은 족한 것이 아닌가. 달리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우리들이 세상으로부터 인정이라도 받기를, 찬사라도 받기를 바랐는가? 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르틴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의 본질은 결국에는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되돌아가자, 는 것이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근원이자 중심이자 기준이시며, 그분이 아닌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 어떤 것도 결코 "신성"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만인이 직접, 그 어떤 인간 중보자도 거치지 아니하고 오직 직접,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선언, "오직 말씀"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그분께 의롭다 칭함 받음" 만으로 되돌아가자는 선언이었다.


이것은 결국 말이 길 뿐, 단 하나로 증언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 중심성으로의 회귀."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인간이 만든 "종교, 교리, 형식, 체계, 조직..." 등의 육적인 것들이, 도가 지나쳐서는, 영적인 진리를 침범하는 것도 모자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고,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오직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회귀할 때이다. 이것이 내가 주창하고자 하는 첫번째 진리이다 : 교회는 신성하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신성하시다. 교회는 최고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위 없이 높고 원만하시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교리도, 신학도, 체계도, 의례도,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다. 오직 "한 영혼이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는 순간"만이 신성한 것이다. 나머지는 오직 이 중심성 하나로 말미암을 뿐이다.


그렇다면 본래적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중심성이란 무엇인가? 이는 곧 "신성"으로서의 그분을, 나의 "영(Spirit)"으로 영접함으로써, 그분의 신성과 나의 영혼이 연결되고, 교감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고..."와 같은 표현에서, '나라'는 애초에 하나님과 따로 있는 어떤 독립적 공간이나 차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 그 자체"가 곧 나라다. "하나님 그 자체"가 곧 나라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임재하신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물론 엄밀히는 차이가 있지만, 애초에 그런 신학적 차이보단 진심이 더 중요하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도 신학보다는 진실하고 절실한 믿음을 더 중요시하신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결국 기독교의 진리, 즉 복음(福音)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하여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요 11:25-26, 14;20, 14:23 등), 에 있는 것이다. 이때의 "믿음"의 대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 이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가장 귀중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는 저 요한복음에서 이르는 그분의 "나는...이니(I AM)"의 말씀들을, 그분의 "인성", 곧 육신과 자아로서의 그분의 존재라고 이해해버리면 너무도 뻔한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그분이 "생명의 떡"이라면, 제자들이 그분을 죽여서 피와 살을 먹기라도 해야 했다는 소리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분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를 사랑하는 자의 안에 나와 내 아버지가 거할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초자연적인 마술이라도 부리신다는 말씀인가? 당연히 아니다. "보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완성되고 드러나는 그분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영접하라는 소리다("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 요20:29). 애초에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실재한다"(히11:1)는, 굳이 더 말해야 입만 아픈 뻔하디 뻔한 기독교적 핵심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에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곧 하나인 것은 맞되,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분의 "신성", 달리 말해서 "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란 소리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신성은, "태초부터 계시며,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며, 모든 존재와 현상과 사건과 영혼들 안에 거하시는", 명백히 초월적이고 내재적이고 근원적인 신성이시다. 이것이 "성자 그리스도"의 위격의 실체다.


또한,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분의 신성을 영접하는 누구라도 멸망치 아니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이 오셨으며, 성경 여디에도 그분이 직접 설하신 말씀 중에서 "특정 종교, 교리, 전통, 체계, 계파...."에 속해야만 구원받는다, 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요1:12, 요3:16 등). 오히려, 육적인 조건은 "허망한 것"이며, 이를 초월하여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요4:23) 모든 영혼들에게 "구원"은 평등하게 길이 열린 것이다. 즉, 애초에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 너무도 유감스럽고 슬픈 일인 것이다. 기독교는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수단으로써, 인류 보편의 원형적-영적 진리 그 자체가 되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 이는 더욱이 쉬운 문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마22:37-38)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무용한 짓이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마7:21). 오직 영으로 그분의 신성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영"이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곧 "믿음"이며,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내 존재와 삶 전체"를 인도하시고 이끄신다, 는 것을 실체화하는 유일한 핵심 진리다. 그리고 이는 오직 단 하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른바, "요한적 신앙"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비주의의 비밀이며, 나머지 모든 것이 오직 이 하나로 말미암는다.


이 모든 것들은, 즉, "살아서 내 안의 신성을 사랑하여, 신과 하나되는 것", 곧 복음은, "인류 보편에게 열린 길"이지, "특정 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육신의 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배타성과 특수성이라는 죄성에 취하고 나면, 결국에는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며,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이분께 의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그분의 성육신의 진리를 대단히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너희도 나와 같이 될 수 있으며, 그리 되어야 한다"(요14:12, 요14:20, 요17:20-23 등)고 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하여 "누구라도 다" 살아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 하나됨 안에 거하는 것, 사는 것, 또한 이를 통하여 사람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그리스도의 길을 뒤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분의 의지이시다. 따라서, 이점에서 그분의 "육신"적 부활만이 "유일한 대체불가능한 믿음의 대상"이라면, 정작 그분의 육신의 부활을 목격한 극히 소수의 인간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고, 이를 직접 목격하지 못한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오류가 도출된다.


또한 이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크신 뜻과도 명백히 대치되는 것이다. 즉,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 그 자체를 신성시하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성육신의 교리는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뜻이 보이는 세계 전체에 영향을 주며, 이끄시며, 통치하시며, 인도하신다", 곧 위와 아래의 연결성을 중보하기 위한 것이요, 또한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나머지 모든 "믿는 자"들의 안에서 동일하게 보이지 않는 죄성이 죽고, 보이지 않는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영적 역사의 절대적-영적 근거로서 이루신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명명백백히 올바른 처사이다. 즉, 좀 더 '위험하게' 말하자면, 성육신 그 자체는 수단이자 도구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 곧 복음의 성취를 위한 '근거'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에만 "광적으로" 집착하며, 이로 인하여 배타성과 특수성이라는, 복음적 진리와 대치되는 너무도 중대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육신의 교리를 "믿고", 또한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모두 인정하며, 심지어 이는 "기독교적 복음적 진리와, 나머지 가타부타한 어중이떠중이들을 가려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교리라고 확신한다. 다만, 성육신의 교리가 그토록 중요한 까닭은, "오직 예수님 한 사람만 육신적 부활을 이루셨다"는 것을 광적으로 집착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가장 최초의, 높은,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도 역시 "살아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하여)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이미 이루셨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을 이를 믿고, 실천하고, 지향하게 하시려는 "의도"에서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며, 또한 "원형적 신화"로써, 모든 믿는 자들 안의 영혼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영적 역사를 "작동"하게 하는 "원동력"으로써 이루신 사건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의 변화는, 반드시 보이는 차원에서도 작동하고 실재한다"는 믿음(히11:1)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육신의 교리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교리의 올바른 복음적 이해의 기준에서 볼 때, 양태론, 삼신론, 영지주의 등이 "왜" 이단인지가 모두 드러나는 것이다(이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육적인 것은 도외시하고, 오직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보이지 않는 차원의 변화를 통하여 보이는 차원을 변화시키고 완성시키는 것', 곧 성육신의 진리를 통한 십자가 부활 그 자체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의 저 유명한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 안에 내재한 신성(그리스도)을 영접하고 연결되는 것(하나됨)을 통해서만, 신과 하나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류 보편의 복음적 진리의 "방법론"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어떤 의미에서, "하늘나라의 가장 비밀스러운 진리를 아낌없이 세상에 공개하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원형적-내재적-근원적 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 중심성과 성육신의 진리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른 종교, 전통, 철학, 교리, 체계, 영성들과의 교류와 협력과 연합을 통하여, 이 "하나됨의 진리"를 각자의 지역과 문화와 전통의 언어로 "번역, 통역"하여 공유하고 이해하는 능동성과 유연성을 발휘해야만 할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이 모든 진리는 간단하다 : 삶 속에서,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 하나되는 것이 곧 구원이며, 아버지께서 임재하시는 것이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아버지와 하나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내 안의 신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세계 전체를 변화시키고 이끌고 완성시킨다, 는 "하나님의 은총"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증거이자 "원형적 신화"로써,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개인의 삶에서는, "육신의 부활" 그 자체보다는 사실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성취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그분을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 이것 하나만을 위하여 모든 신앙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며, 이 하나가 되면, 나머지(예: 복음 전파, 사명 수행 등)는 자연스럽게 연역적으로 뒤따르고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보편적 복음주의"로서의 그리스도 중심성과 성육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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