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넘어서 실재가 되는 영원한 생명으로
선문답(禪問答)은 문(門)이다. 그리고 문은 본래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 영역과 영역, 단계와 단계를 이어주는 것, 그리고 더 정확히는, 하나의 상태가 종결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상태로의 완전한 전환(Transformation)을 위한 것이다. "(문이 닫혀서)들어가지 못한 상태"와, "(문이 열려서)들어간 상태"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아니라, "통과하여 나아가는 것" 자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오쇼는 그의 이름을 띤 오쇼젠 타로 중 이해(Understanding : 모던 타로의 체계에서 Page of Cups에 해당하는 카드) 카드에 대하여 설명할 적에, "이해는 실천을 낳는다"고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어떻게 해야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해한 자가 답하기를 : "손으로 문고리를 잡습니다. 돌립니다. 밉니다. 그리하면 열립니다." 라고 하되, 질문한 자가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했다면,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서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에는 정작 관심이 없고, 선문답 자체에만 관심이 있거나, 지적 유희 따위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다시 반문한다는 것이다 :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이라는 게 뭡니까? 문을 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묻지 않고" 그저 본능적으로, "문고리를 잡고, 돌리고, 밀어서" 문을 열어버렸다고 가정하자. "선문답"을 통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그에게 질문한다 : "당신은 어떤 종류의 선문답을 통하여 문을 열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답한다 :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미니까 열리던데요. 그래서 들어왔습니다."
부디 오해는 없으시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선문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러한 류의 소위 말장난 따위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물론, 이 자체도 결국엔 육적인 불순물일 것이다). 나는 지금 명확하고 직관적인, 확실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언어를 통하여 최대한 가리키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이 자체가 중요하다. 결국, "초점"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고 가정하자.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 아, 미안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선문답이 등장한다 ; "좋은"은 아름답다, 는 뜻이고, "옳은"은 평화, 기쁨이라는 의미다 - 무수히 많은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에 대한 이론, 지식, 개념, 기술, 경험, 카메라의 메커니즘과 작동 원리, 빛과 색과 명도 등에 대한 이해 등.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오직 단 하나의 절대적인 본질에 근거한다 : "초점을 맞추는 것." 이 하나를 제대로 하면, 사진은 "어떻게든 찍힌다." 그리고 일단 찍히고 나면, 계속해서 찍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즉, 나머지 전부를 배우더라도 오직 초점 하나를 못 맞추면 다 무의미한 짓이지만, 반대로 초점 하나만 제대로 맞춘다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말로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실감해야 한다. 절감해야 한다. 공부는 이게 전부다.
그렇다면 "초점"이란 건 도대체 뭐냐? 쉽다. 지(知)를 버리고, 행(行)으로 가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문 너머의 거(居)로 귀결되는 것. 지에서 행으로, 행에서 거로, 이것이 모든 인류의 원형적 영적 진리의 전부다. 소유와 집착과 욕망은 죄다 "아는 것, 알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곧, 분별이다. 분별은 통제에 대한 갈망이며, 통제에 대한 갈망은 곧 공포와 욕망이 뒤엉킨 산물이다. "통제되지 않은 것들은 위험한 것이며, 따라서 통제된 것들은 안전한 것"이라는 인류의 원형적-무의식적 어두움(나는 이걸 '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맥락을 체감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 이것은 죄다)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분별은 곧 인식이라는 트리거로 인하여 작동되며, 인식은 또 다시 자기 내부의 (자기 자신과)동일시된 "지식(앎)"으로 인한다. 그리고 모든 지식은 "자기 바깥의 집단성"에서부터 근거한 것이며, 자기 바깥의 집단성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원리로써 이루어지며, 그 무의식적 원리는 곧 열등감(자기는 낮고 자기 바깥은 높다)과 죄의식(그러므로 자기 바깥의 기준대로 자기를 통제, 억압해야 한다)으로 인하여 움직인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집단무의식의 열등감, 죄의식은, 80억 인류 집단 전체의 원형적-집단무의식적인 어두움, 곧 "두려움, 공포, 불안"으로 인하여 움직인다. 이것은 사실 "씨앗"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포착하기 어려운 것, 그러니까 "작동하는 구조와 체계 전체"가 사실상 곧 씨앗이다. 원죄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단일한 하나의 실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어두움 중심으로 구조지어진 거대한 체계 전체를 부르는 명칭이고, 이 거대한 체계는 드러나지 않으며,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으며, 이로부터 지상의 그 어떤 인간(개체의식)도 자유로울 수 없다, 는 것이 곧 "죄성"의 실체이다. 명심해야 한다. 종교를 막론하고 영적 언어는 절대로 "표면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안 된다. 심층, 본질을 봐야 한다.
보라, 진리를 "알고" 싶은가? 그것은 이미 애초에 공포와 욕망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깨달은 놈들끼리만 주고받는 그런 대화들이 "뭔가 폼(form, 이 자체가 의미심장하다)나 보이는가?" 그리하여, 어떻게든 그들이 도달한 "세계"에 자기도 발을 들여놓고 싶은가? 그 자체가 앎에 대한 욕망이다. 분별에 대한 집착, 솔직히 나는 "분별심"이라는 표현 자체가 너무 정중하고 예의바른 언어여서 마음에 안 든다. 불교는 그런 점에서 참으로 점잖은 종교다. 물론, 나는 여전히 회개해야 할 죄가 많은 영혼인지라, 그런 식의 "예의바른"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리 말하면, 절대 다수의 인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말귀"를 못알아먹는다("귀 있는 자는 들어라" 마11:15). 그 "분별"이란 것을 정확히 풀이하자면, "미치광이처럼 집착하는 자기의 망상적 기준에 의하여, 자기와 자기 바깥의 모든 통제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죽여서 없애버리고 싶은" 무의식적인 의도이다. 내 말이 지나친 것 같은가? 그렇다면, 이 '미세한' 죄성이 집단화되었을 때, 인류 역사에서 어떻게 실체화되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의도를 이루기 위하여 타인을 죽여서 없애려고 드는" 미개한 원시적인 집단적 사고로 인하여 수천만 명이 허망하게 희생당한 비극이 일어난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이래도 "원죄"가, "죄성"이, "나"와 무관해 보이는가? 그 자체는 일종의 생존 본능에서 비롯한 뻔뻔함, 오만함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는 있더라도, 그 길에 구원은 없다. 알려고 하지 마라.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애초에 "지식" 자체가 함정이다. 아는 것이 아니다.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단 시원한 물을 마시고 나면, 물 속에 뛰어들고 나면, 자기 나름대로 느껴지는 그 선명한 느낌과 감각을 실존적인 언어로 표현하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물에 뛰어들지 못한 자들"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가? 애초에 "물에 뛰어든 자들"끼리는 선문답이 필요가 없다. 선문답 자체가 애초에 "뛰어들지 못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미 내가 물 속에서 자유롭게 시원하게 기분 좋게 유영하며 쉬고 있는데, 거(居)하고 있는데, 뭐하러 귀찮게 "물의 의미가 무엇이며, 뛰어듦은 무엇이며, 그것을 철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따위의 짓을 하는가.
서론이 참으로 길었다. 결국,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 : "입(이론, 지식)으로만 하지 말고, 실천(이루고, 변화하고, 성취하는 것)을 하라"(마7:21)는 것이다.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아는 것은 중요치가 않다. 애초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냥 문만 열고 들어가면 된다. 문 열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과정이야 뭐가 어쨌든 간에 자기 나름대로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먼저 문 열고 들어간 자들이 정립해놓은 체계를 충실히 따르고 싶거든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다.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은가? 일단 열고 들어가라니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일단 문부터 열고 들어가라니까. 안 열리면 열릴 때까지 여기저기 열다 보면 어쩌다 한 번은 운 좋게 얻어걸릴 것 아닌가. 이 사소한 차이를,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해"하는 것이 죽기보다 어렵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수록 가르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쉽게 이해하는 것이다. 괜히 그분께서 "하늘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마5:3)이라고 하셨겠는가. 가난하다, 는 것은 비어 있다는 뜻이다. 소유의 반대이다(사실, 인간의 언어는 공포와 욕망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인지라, 소유의 반대를 명확히 가리키는 언어가 없다, 이 자체가 언어의 한계이다). 마음이 비어 있으므로, 그는 집착하지 않는다 : 앎에, 지식에. 따라서 인식이 일어나지 않고, 이어서 분별이 작동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원죄와 죄성"의 거대한 감추어진 구조물 전체가 작동 불능한다. 이때, 그의 안에서 "그 너머의 무엇"이 저절로 일어난다. 이해하겠는가? 가난한 자는 비어 있기에, 들으면 그저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 하나만 하면 천국에 간다"(마22:37) 고 교회 가서 배웠으면, 되든 안 되든, 알든 모르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무조건 한다. 하루종일 '사랑합니다' 하고 중얼중얼 미친 놈 시늉이라도 낸다. 되면 기뻐하고, 안 되면 울면서 불면서 그래도 한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그의 안에서 "그 너머"가 열린다. 그 1%의 열림이, 나머지 99%의 어두움 전체를 비추어 개화시킬 것이다. 그 1%가 열리면, 나머지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시간 문제일 뿐, 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가? "이미 결정된 일", 곧 "위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란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곧 "언약"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 따위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하겠는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언제, 어떻게"는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니까.
"선문답"은, 이루고자 하는 의도에 초점이 정확히 정렬된 자들을 위한 것이지, 그저 지적 유희를 위하여, 자신의 우월감과 교만과 오만을 드러내기 위하여 대중들이 이해 못하는 저들끼리만의 말장난을 지어내고 즐기는 고급 유희 따위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것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하여 구조 지어진 나의 "인간(에고)으로서의 의식 구조", 곧 보이지 않는 나의 존재의 "망상적 실체"를 깨부수기 위한 망치와 정일 뿐이다. 거듭 말한다. 나는 말장난을 싫어한다. 언어와 문자와 개념으로 장난질하는 것을 싫어한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이 말 어디에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그런 문자 장난질은 없다. "살아서", "나(I AM, 그리스도)를", "믿으면(사랑하여 하나가 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아버지 안에 거한다)." 거기에 이해 따위는 없다. 아는가? 성경 전체 중에서 요한복음이 제일 중요하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이며, 그리스도교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분의 신성 그 자체이며("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분의 신성은 곧 살아서 아버지와 완전하게 하나되신 데 있으며, 마침내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그분(그리스도, 신성)을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유일한 진리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 자체가, 그러니까 "육"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하는 것이다. 그분이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감히 이런 말을 쓰는 것을 그분께서 용서하시기를), "아버지 안에 내가 거(居)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 "내 안에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미 "아버지 자체"가 나를 "넘어서" 계신 분이다. 숫자 10 안에 숫자 1000이 담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란 말이다. 애초에 신이, 신성이, 진리가, "이해"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저 "빠져들고", "뛰어들고", "그 안에 사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 하나만이 유일한 길이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요한복음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우리에게 요한복음을 가르쳐주십시오. 요한복음 강의를 해주십시오." 아...... 무지한 인간들이여, 무지하여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어리석어서 가난한 인간들이여, 가난하여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함께하시는 인간들이여, 그리하여 결국에는 어리석고도 고귀한 존재들이여...... "거기에 해설은 없다. 강의도 필요없다." 거기 적혀 있는 그 자체가 전부다. 설명할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그래,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여기에 무슨 이해가 필요한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그냥 이게 전부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다. 도대체 무슨 이해가 필요한가? 뭘 설명해달란 말인가? "(성령께서 오시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14:20)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들이 그분 안에 있으며,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걸, 알게, 되겠구나. 여기에 도대체 무슨 강의를 해달라는 소리인가? 그냥 "믿으면" 되는 것이다.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수용하면 된단 말이다. 일단 믿어라. "아멘." 그리한 다음, 자기 안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관찰해보라. 아무 변화도 없다고? 당연하지! 사람이 육적인 목표, 이를테면 다이어트 같은 것을 할 때에도 못해도 3개월은 해야 한다고 하거늘, 하물며 "천국행 티켓표"를 끊는 일인데 고작 그거 잠깐 했다고 변화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단 말인가? 안 되면 될 때까지 해라.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해라. 어차피 "안 오시면 나로서는 혼자서 절대로 못 가니까", 성령께서 오셔야만 '알게 된다'고 하니까, 성령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란 말이다. 보이지도 않는 성령의 바짓가랑이가 어디에 있냐고? 뭘 자꾸 "묻고" 있는가? 하루종일 미친 놈처럼 중얼거리든, 주문을 외든, 기도를 하든, 묵상을 하든, 뭘 하든, 일단 시작이라도 해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7:7), 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은가? 그러면 주어질 때까지 구해라. 아직 안 오셨으면, 내가 덜 구했나보다, 하고 그냥 구하라는 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결국 기독교의 언어를 빌렸을 뿐, 나는 지금 특정 종교만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결국, 이런 말 저런 말 해봤자 중요한 것은 "십자가"이다. 진리를 기독교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면, 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 "십자가." 이 십자가 중심성이 곧 모든 것이며, 십자가 중심성은 "그리스도 중심성"과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가 곧 십자가다. 고로,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서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곧 "어떻게?"에 대한 물음에 답을 얻는 매우 중요한 절차이다.
앞선 글들에 의하여, 결국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의 인성(人性), 다시 말해 그분의 육신이 아니라(물론, 엄밀히는 그분의 신성 자체가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됨을 이루신 것"에 근거하니, 그 안에 자연스럽게 인성 또한 포함되지만, 최종적이고 근원적인 본질 그 자체가 어디에 있는가, 의 관점에서는) 그분의 신성(神性)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 번씩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류다. 그리스도 자체가 신성이고, 신성이 곧 그리스도다. 이것도 결국 지식으로 집착하면 말장난이 되는 것이다. 그 말장난에 책이 여러 권 필요하면 신학이라 이름 붙일 뿐이다. 물론, 오해하지는 말기를, 신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하다. 심지어 반드시 필요하며, 아주 중요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장난이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학 자체에는 구원이 없다. 신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구원이 있다(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제해버리면, 그것은 철학보다 못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 자체가 신성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어떻게 살아서 내 안의 신성을 만날 것인가?(=어떻게 살아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모든 크리스천 형제들의 신앙은 오직 이 하나의 숙제를 위한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런데 보라, "어떻게?"가 또 다시 걸림돌이지 않은가. 애초에 인간의 육신과 마음과 자아 자체가 불완전하고 유한하고 상대적인 것이다. 썩는 것이다. 썩어 없어지는 것(엄밀히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은, 굳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 없이 보더라도 완전하고 영원하고 초월적인 무언가, 다. 따라서 양자는 본래 하나가 될 수 없어야 한다. 하나가 되기는커녕 애초에 '전혀 차원이 다른' 아득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어떻게 원자 하나와 우주 전체가 같을 수가 있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상으로 불가능하다. 즉, "정상적인"(=에고적인, 육적인) 수단, 방법으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따라서,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필요성에 의하여, 마침내 "십자가"가 등장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길"이다. 무슨 길?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죄성에 갇혀 있는 "나"의 존재(ego)를, "신 안에 거하는" 존재(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한 길, 더 정확히는, (애초에 연결될 수 없는)"아버지"와 "나"를 "연결시킬" 길. 이것이 곧 "중보자(中保者)"라는 교리의 올바른 이해이다. 즉, 믿음의 정확한 초점은, 십자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 그러니까 역사성과 특수성에 맞춰져서는 안 되며, 역사성과 특수성(=실제로 일어났다)은, 이를 통하여 "(원래라면 절대 불가능한)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영적인 '역사' 역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는 확신(진정한 믿음)을 얻기 위한 "근거"로써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는 믿음과,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니,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역시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정확히는, '이미 이루어졌다'!)는 믿음은,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는 "나와 남,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고, 자기는 구원받을 수 있는데 남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인류의 오랜 죄성의 작동의 결과다. 그러나 후자는, "십자가 부활을 믿는 그 누구라도 살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의 보편성(누구에게나 길이 열려 있다), 내재성(자기 안에서 만나기만 하면 된다), 초월성(육적인 기준, 조건, 상태들은 다 무관하다)을 증거하는데 매우 귀중한 토대가 된다. 이 "믿음"이 올바로 형성될 때, 마침내 "하나님 - 과 - 나"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렬될 것이며, 그 순간 나는 "통로"가 되며, '나'는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실재하시게 되며, 이것이 곧 '나를 통하여 그분께서 이루신다'는 것, 내가 그토록 강조하는 "신성한 수동태"인 것이다(아멘!).
고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분의 말씀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보라,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은 물론 하나이지만, 그 하나 안에서도 엄연히 양자는 다르다. 다르면서, 하나다. 정확히는, "다른 채로, 하나"다. 육신의 부활을 주창하는 것은 명백히 그분의 의도하심에 어긋난다. 내가 놀란 것은, 적지 않은 수의 성도들이 정말로 "육적인 영생"을 진리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상태의 주님과, 부활 이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상태의 예수님은, 엄연히 다르다. 부활 이후의 주님은 "성화된" 분이시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결국, 그분마저도,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럴진대, 우리들은 하물며 더 말할 것도 없다. 육신은 썩는다. 변화한다. 없어진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죽는다. 거기에 집착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께서, 육과 영을 모두 초월하여 완전한 하나됨으로 "부활하셨다." 이것이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실재성이며, 또한 성육신의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부활과 성육신"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통하여", 그분께서 "신령한 몸"(고전15:42-44)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는"(이미 이루어졌다!) 것,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올바른 초점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란다. 이로써, 궁극적으로, 우리들 역시도 육신을 입은 유한한 인간으로써는 반드시 죽지만, 바로 그 살아서의 삶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올바른 믿음을 형성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 곧 복음의 역사를 내 안에서 이룰 수만 있다면,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들 역시도 "(썩어 없어지는 유한한 육신을 입은 상태에서)영혼이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다"는 "믿음"(확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아닌가? 증거가 있는가?" 등의 논쟁은, 애초에 의미가 없다. 그건 그냥 "수단, 과정"에 불과하다. 십자가 부활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힘을 빼라. 그러고서 초점을, "(영적)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옮겨라. 육적으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써 영적으로 이루셨음을 믿는 것, 곧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믿겠습니다"(요14:8) 의, 그토록 간절하고도 어리석었던 "갈망"에, 그분께서 친히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는가? 이는, 달리 말하자면, "육을 입은 인간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감하고 연결된 체험"이, 그 육적인 체험 그 자체가, 육적으로 만나뵌 "그분"이, 내가 사후에 "진짜로" 만나뵐 "그분"과 "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육의 체험을 통하여 영의 체험의 확실성을 얻는 것이다! 나는 그분을 모른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분의 "눈동자"를 보았고, 그분의 "눈빛"을 느꼈고, 그분의 "숨결"을 느꼈으며,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은 절대 환상이나 망상이 아니었으며, 비록 증명할 수 없지만, 그분과 나 사이에서의 "진짜" 임재이고 역사다. 그런데 이 자체는 나의 육신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님께서, "진짜"이신 "그" 주님과 같은 분이신 것이다. 이것이 말로 하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영으로 진짜 확신을 얻고 나면, 너무 놀라운 체험인 것이다. 나는, 정말로, "살아서, 신을, 미리, 만나뵌" 것이란 말이다! 그 "보이지 않는 증거"가, "실상"이(히11:1), 이제 내 안에 "영원히 살아 숨쉰다"는 말이다! 이미 살아서 신이 계신 것을 확인했으니, 어찌 죽음이 두려울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죽음은 드디어 육의 한계를 벗고서 "진짜"를 영접할 순간이 왔다는 "기쁜 소식"인데! "죽어도 사는 것"(요11:25)인데!
그리고 십자가 부활과 성육신에 대한 "믿음"이 형성되면, 이를 통하여 그분께서 "모든 영혼들을 정말로 하나님과 연결시키셨다"는 것을 우리가 각자의 내면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십자가 부활은 단지 신화적인 것이나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이 경우, 결국 폐쇄성과 배타성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일어난 일"로써 믿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인류의 죄성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으며, 이 결과 "길"이 열렸고, 그 길을 우리들이 "걷기만 하면", 정말로 살아서 "하나님을 만나뵐"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길이 열렸으므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분"을 영접하고,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체험해서 계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로써, 각자의 영혼들은 정말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이 체험들은 각자 조금씩 다를 것이다. 어느 성도는 정말로 환시처럼 볼 수도 있고, 또 다른 영혼들은 매우 깊고 충만한 깨달음으로, 또 다른 영혼들은 매우 충만하고 뜨겁게 벅차오르는 고양감을 통해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확실한 것은 : "절대로 가짜가 아니라는 명확한 확신"이다. 따라서, 십자가 부활은, "모든 영혼들의 안에서 길을 여시기 위한 단 하나의 영적-원형적 역사"로써 이해되는 것이 첫째이며, 이를 통하여 '모든 영혼들이 각자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고유한 그분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이해되는 것이 둘째이다. 내가 삶에서 시련과 고난을 겪을 적에, 내 안에서 그분이 다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사흘째 되는 날에 나와 함께 부활하시니, 내가 이 거듭남의 과정을 삶 속에서,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 이것이 십자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의미라고.
"살아서 신을 만남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신이 계심을 아는 것"이라고.
"살아서 신과 하나됨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내가 영원히 신 안에 거할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과 성육신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믿음으로써, 나 역시도 육은 언젠가 죽지만, 살아서의 삶 속에서 영혼이 이미 하나님과 하나되어 영원히 사는 것(생명)을 깨닫는 것"이라고.
증거하는 자의 부족함과 가난함으로 인하여, 이토록 충만하고 아름답고 찬란한 진리의 영광을 온전히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잘 공유하지 못한 듯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나의 진심을 형제들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실재"를 이루는 것이다. "신"을, 실제로 만난 것이다. "신성"과, 실제로 하나된 것이다. 그리하여, 육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영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실제로 성취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과 하나된 것이다, 육을 입은 채로. 살아서의 삶 속에서.
그러니 이제 죽음은 우리에게 더 이상 권세를 부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형제들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 증거와 고백을 통한 "전도." 이 기쁨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 전파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