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
결국, 문제는 "비(非)본질"에 있다. 본질이 아닌 것, 진실(Truth), 그러니까 "불변하는 영원하고 완전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 해석과 접근 방식과 방법론의 차이를 넘어서 진리 그 자체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거나 흔들게 되는 것들에 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진리"를 왜곡하고 변질되고 타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두움을 하나씩 제거하여 원래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려는 접근 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의 진리"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 그 하나를 선명하고 명확하게 "이루어야(역사)" 한다. 그것이 중심이 되면, 그 하나가 자신의 존재와 삶에서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다(요8:3).
거듭 말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답이 없다.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3차원 시공간에 종속된 물질 세계, 그리고 이원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실증-객관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 즉, "구조 지어진" 사고방식들에 묶여 있는 사람들,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직 그들을 위한 성장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여정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그 자체로 "존중"의 대상이다. 그들은 각자 삶의 여정에 따라서 그들의 의식과 정신과 내면과 영혼이 성장하고 열리게 될 것이다.
다만, 보편적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영적 정체성은, 바로 그 "열린" 영혼들, 자신만의 영적 성장의 길을 "이미" 시작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정확히는, 기존의 체계와 전통과 교리와 시스템 하에서 진정한 "진리"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 해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 성장과 변화와 완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곧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그 용어를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결국에는 집단성은 진리를 어떤 식으로든 왜곡, 변질되게 만든다. 본래 진리란 "영혼(Soul)으로, 영(Spirit)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 지식, 관념, 논리, 사고, 그러한 것들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고, 집단성이란 곧 "에고(ego, 자아)"들의 집합 그 자체이니, 따라서 조직과 세력과 단체가 형성되는 순간, 진리를 인간의 언어 안에 가두고 억압하고 변질하게 만든다. 이것은 인류의 필연적인 역사이며,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관건은 "얼마나 순수성을 유지할 것인가?"다. 사람이 무인도에서 혼자 동떨어져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이른바 "사회 생활"이라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보편적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어 밝히고자 한다 : "진리에 관한 한, 철저하게 혼자가 되라.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
신과 하나되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인류의 "영적 성장"의 최초이자 최후의 원형이며, "신"과 "나"가 하나되는 것, 좀 더 정확히는 "신 안에 내가 거(居)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그리고 신은 "내재적, 초월적"으로만 교감하고 만날 수 있기에, 나의 에고(ego)가 아닌, 내 안의 영(spirit)과 영혼(soul)으로만 교감하고 만날 수 있다. 즉,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은 내 육신도, 내 자아도, 내 마음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 "나"라는 존재의 중심축, 영혼이 "신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내 육신이 신성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내 몸이 신비 체험을 해서 신성과 합일되는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육적인 모든 것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나의 본질이 완전히 전환(transform)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본질이 전환되는 순간, "시차"는 존재하겠으나, 마침내 그것이 "보이는 차원" 역시도 변화하게 만든다: 나의 육신, 마음, 자아, 삶의 방식, 외부현실 등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차원이 보이는 차원을 통치하는 것"이, 이 우주의 법칙이며, 아버지께서 정하신 가장 경이로운 법칙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위"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아래"이다. 나의 영과 영혼은 "위"이며, 나의 자아와 몸과 마음과 무의식은 "아래"이다. 지금껏 인류의 언어, 지식, 관념들은 오직 "아래"만을 집착했을 뿐, "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채로 남아 있다. 보편적 복음주의는 바로 이것, 그러니까 "나의 영(Spirit)이라는 본질이, 신이라는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엄밀히는, 신은 "존재"보다 "위"이다)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목적은 종교나 교리, 전통, 신학, 가르침, 계파, 문화, 역사 등을 막론하고, "인류 보편의 영적 성장의 원형"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말이다. 이 "아버지"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이때, "신과 하나됨"이라는 목적에 대해서 몇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우선, 이것은 아래에서의 만남이 아니라 위에서의 만남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환상을 본다든가, 환시를 본다든가, 환청을 듣는다든가, 꿈속에서 계시를 본다든가, 무슨 실제로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현상을 겪는다든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은 대부분은 "평범한 것은 열등한 것이고, 특별한 것은 우월한 것"이라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보편적인 열등감, 죄의식이 공포, 욕망의 형태로 발현되어, 개인무의식을 통하여 개체의식(자아)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패턴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영지주의나 오컬트 등은 전부 이 항목에 속한다고 보며, 옛 시대의 오컬티스트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인류의 영적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나는 그들을 "보편적 신비주의"의 원칙에서 "단호하게 선을 그을 것"이다. 위에서의 만남이란, 문자 그대로 보이는 영역(자아, 마음, 무의식, 표면적인 의식, 육신, 물질 등)을 넘어선, 보이지 않는 영역(순수의식, 혼, 영... 등)에서, "설명할 수 없고, 드러나지 않고, 정의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형태로 연결, 교감, 소통, 합일에 이름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나의 영(Spirit)이 신과 하나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신성)는 "에고"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며, 이 점에서 육적인 모든 행위나 방법들: 예를 들면 소리내어 기도를 하거나, 기도문을 낭독하거나, 찬송가를 부르거나, 예배를 올리거나, 명상하거나, 그밖의 모든 외적이고 육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자극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으로써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일종의 "영적인 플라시보 효과"를 노린 것이다. 물론, 나중에 말하겠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플라시보 효과"가 "실제 법칙"을 상회한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 다음은 변환(Transformation)이다. 변화(Change)와 변환은 다르다. 변환이란, 문자 그대로 "어떠한 존재의 근본적인 본질 그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거듭남", "(내 안의 그리스도의)부활" 등으로, 불교에서는 "해탈", "견성", "깨달음", "열반" 등으로 표현할 것이다. 사실, 이런 용어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인간의 언어, 지식, 관념은 "아래"에 속한 것이어서, 아래의 것으로는 위의 것을 가리킬 수도 표현할 수도 담아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과 하나됨이란, 점진적이고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나의 근원이, 한순간의 찰나(물론 영적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적인 시간이 아니라)에,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급격하고 거대하고 완전하게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천 형제들은 "칭의"로 이해해도 된다. 사실, 그 단어의 본래 의미 자체가 애초에 이것이다. 불교적인 개념으로는 "돈오(頓悟)"에 해당할 것이다. 단, 명심해야 할 것은, 본질이 변화했다고 하여 모든 것이 다 "완료"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Spirit)은 "구원"받았더라도, 여전히 그 아래의 혼(Soul), 순수의식(자각), 마음, 자아,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그리고 마침내 육체까지, 층층이 모든 것들이 "최초의 본질"에서 전환된 것이 물들어서는 최종적으로 표면적인 수준까지 변환이 완료되기까지는 상상 이상으로 오랜 세월이 걸린다. 즉, "본질은 한순간에 전환되나, 현상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나, 성화는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지상의 삶은 그 자체로 천국, 즉 "구원 이후에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인 것이다. 천국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추후에 따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연결"이며, 또한 "존재"의 변화이다. 말이 어렵지만, 간단하다. 나의 존재의 가장 깊고 높은 층위부터, 나의 존재의 가장 얕고 표면적인 층위까지를 모두 연결하여, 이러한 "구조적인 총체"로서의 나의 존재 전체가 신과 완전하고 영원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에게 가까운" 존재(예: 나의 영, 혼, 순수의식 등)에서부터 "신에게 다소 먼" 존재(예: 나의 에고, 마음, 무의식 등)에 이르기까지, 이 하나의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중심축", 즉 신과 합일한 나의 본질(구원받은 상태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 상태, 내지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 안에 거한 상태의 형제이자 제자로서의 존재 상태)로 인하여 다층적이고 구조적으로 영향을 받고 움직이는 그러한 차원에서의 변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에고(육)의 욕망"과는 관련이 없다. 신을 만나고 신과 하나된다고 하여 딱히 돈이 많아지는 것도 행운이 오는 것도 갑자기 사회적으로 성공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위가 열렸으므로 점진적으로 아래도 따라서 열리는" 차원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육적인 관점으로 "신과의 하나됨"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과 하나됨"이라는 보편적 복음주의의 목적이다. 이것은 모든 영혼들이 다 추구해야 할 목적이며, 모든 영혼들이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태어나는 유일한 이유이며, 모든 영혼들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각자의 영혼은 각자의 여정에 맞춰 "신과 하나되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여 "길"을 걸어가며, 그 과정에서 각자의 내면에서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영접한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에 다다르는 순간, "생명"을 얻는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진리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칙, 곧 "내재성"이다. 즉, "내 안의 신성(그리스도)"을 통해서만 신과 하나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의 신성,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간에, 무슨 이름으로 가리키든 간에, "나"라는 존재의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그 중심부에 자리한, 영원하고 완전한 "빛", 곧 "모든 존재 안에 거하는 신의 숨결",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만, 그것을 통해서만, "목적"에 다다를 수 있다. 내재적 신성이다. 이 원칙에서 어긋나는 한, 그 어떤 것도 진리가 될 수 없다. 사람이 만든 것들, 육에 속한 것들, 현상계에 속한 것들, 이를테면 특정한 사람이나 개인을 신격화하거나,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 영역을 신성시하거나, 물질적인 특정한 현상이나 사건, 체험 자체를 신성시하거나, 그밖의 모든 유형들이 다 이 원칙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엄밀히는, 예를 들어서, "내 안의 신성을 통하여 신과 하나된" 존재들이 일정한 장소나 공간 안에 거할 경우에, 그 장소는 "성화"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교회는 "신성하다." 다만 교회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또 다른 맥락으로, 신과 하나된 영혼이 그 자신을 통로로 삼아서, 성장 중의 다른 영혼에게 필요한 것(메시지, 지혜, 도움 등 무엇이든)을 전할 경우에, 그는 잠시 "신의 일을 대신하여 행하는 자", 곧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그의 "영혼은 사자(使者)로써" 신성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때에도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다. 같은 맥락으로, 신과 하나된 영혼이 어떠한 특정한 사건, 현상을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으로 일으킬 수도 있다(예: 예언, 예지 등). 이때, 그 사건은 "신과 하나된 영혼을 통하여" 드러난 것이므로 신성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사건이나 내용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다. 즉, "내재적 신성"을 통하여 "신과 하나됨"만이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절대적으로 신성한 것이며 "신" 그 자체일 뿐, 이를 제외한 나머지 "보이는 차원"의 그 어떤 것도 "감히" 그 자체로 신성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결", "하나됨"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영적 진화의 단계적 과정의 총체"를 실제적으로 이끌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통치"하는, 그러니까 쉽게 말해 "작동하는" 신성(물론, 성령의 격을 "작동"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오해를 낳기는 하지만, 초심자들을 위한 표현임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이 존재한다. 바로 이 점에서, 모든 구도자들이나 수행자들, 신자들, 명상가들, 누구든 간에, 소위 말하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하는 신성의 에너지이며, 신성의 빛이며, 신성의 "기쁨"이며, 신성의 "권세"이며, 신성의 "영광"이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각 종교나 전통마다 젝각기 다른 상징, 원형 등으로 표현될 수가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보편적 신비주의에서는 이것은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본 모든 것들, 그러니까 "신과의 합일"(성부), "내재적 신성"(성자), "작동하는 신성"(성령), 이렇게 "삼위일체"의 하나님(신)이 계시며, 이 전체를 "아버지"라 하며, "아버지는 실재하신다." 엄밀히는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 사건, 현상들은 이 하나의 절대적인 실재성, 곧 "아버지"로 인하여 말미암는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 역시도, 종교를 초월하여 인류 보편의 원형적 신성이다. 3이라는 숫자 자체는 원형상징으로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완전"이자 "신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리(Truth)"란 무엇인가? "신과의 하나됨"이며, "내 존재의 중심(영)이 내 안의 신성과 연결되고 하나됨으로써, 나의 존재가 전환되고, 이로 말미암아 신과 하나되는 것"이며, 이 전체 과정을 오직 "신성(성령)에 의해서만 인도받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 보편의 원형적 영적 진리이다. 이것을 제외한 다른 무엇도 없으며, 달리 말하자면 이것 하나를 제각각 여러 관점들에서 풀이한 것이다. 물론, 세부적인 차이들도 매우 많이 존재하며, 그러한 것들은 보편적 복음주의에서는 "연합할 수 있는 범주"로 이해될 것이다.
오늘날, 무수히 많은 "영혼"들이, 사이비나 이단 등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무지", 즉 어리석음 때문에, 알지 못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육의 세계에서도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자보다 정규 교육을 졸업한 사람이 사기꾼으로부터 비교적 잘 속지 않듯이, 영의 세계에서도 이른바 "진리(Truth)"라는 것은 실재하며, 이에 대하여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거의 절대 다수가 "무지"하며, "미개(未開; '열리지 않았다'는 뜻)"하다. 사실, 내가 지금 서술하는 내용들은, 영적 세계에서 공부하고 수행하며 함께하는 나의 형제들이 보기에는, "너무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상식 중의 상식, 우리 형제들이라면 누구라도 다 아는 내용들을 내가 "굳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하기를, 아직 "보이는 차원"에 종속, 지배당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제는, "인류가 영성에 눈을 떠야 할 때"이다.
기억하라 : 영적 세계는 다원적이지 않다, 애매모호하지 않다, 어중간하지 않다, 영적 세계는 하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중심으로 하며, 오직 "하나의 신(성)"으로 인하여 말미암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선명하고 직관적이고 완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