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 내재성, 초월성의 원칙

보편적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세 원칙들

by 생명의 언어

<선(禪)의 영혼이 깃든 타로>에서, 오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는 '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 그 단어는 기존의 종교와 철학에 의하여 너무 많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존재', '존재 자체'라고 부르겠다." 나는 그 책에서의 오쇼의 거의 대부분의 가르침들과 표현들에 대하여 크게 공감하며 동의한다. 다만, 딱 한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나는 오쇼를 매우 크게 비판한다. 바로, 그가 "신"의 이름을 버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비록 "신"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이유 불문하고 심각하게 왜곡, 변질, 오염, 타락한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그 오염을 정화하고 원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회복하는 길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라도, 반드시 <신>이라는 이름은 인류 영성의 필연적이고 원형적인 중심으로써 보존, 계승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나는 회색주의자가 아니다.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하여 가장 선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교와 영성과 신앙에 대해서도 매우 분명한 원칙을 갖고 있다. 나의 모든 것들은 "신과 함께하는 여정"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나는 지금의 내게서 이루어진 것들에 관한 한, 절대 그 무엇과도 타협할 생각이 없다. 가장 순수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신"을, 나는 영원토록 사랑하고, 열망하고, 기뻐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신>이라는 말을 대단히 크게 오해하고 있다. 그 이유 중 절대 다수는 당연하게도 종교로 인한다. 기존의 종교들이 "신의 이름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신의 이름으로" 적(敵)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마침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참사를 "신의 뜻"이라는 미명 하에 정당화하는 도구이자 수단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며, "자기들끼리만 구원받는다"는 인류의 이기심과 교만함과 욕망이라는 원죄(Original Sin)를 신성으로 둔갑해버렸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으로 오늘날 여전히 무수히 많은 폭력이 행해지고 있으며, 또한 신의 뜻이라는 미명 하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심판하는데 열의를 올리고 있다. "자기들 조직과 단체와 계파에 속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상대편 진영을 죽여 없애려고 든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집단성"이라는 인류 보편의 어두움 때문이다. 물론, 종교를 막론하고 어디든 간에 진실하고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이름 없는 많은 영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형제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존중받아야만 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집단성으로" 신의 이름과 신의 뜻을 세운 결과는 거의 대부분 끔찍한 폭력을 낳았다는 점에서, 나는 현 시대에서는 현대에 맞는 완전한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바로 "집단성에서 → 개인성으로."


나는 지금까지 기존의 종교가 인류의 영적 성장의 과정에 있어서 공헌한 것에 대하여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한다. 중세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외부세계는 위험했고,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얼마든지 개인이 집단에 희생당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한 신념과 이상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인보다는 집단성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에 의해, 혼자서 "불안"이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당면하기보다는, 함께 모여서 신앙을 유지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집단성이 개인의 생존과 안위와 행복을 보장해줄 수 없는 여건과 환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 이상 "사회"만을 믿고서는 개인의 생존을, 번영을, 안정을 보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미래는 불안정해졌다. 집단의 힘과 권위는 무너지고 있다.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 앞에서, 각 개인들은 자신들의 실존적인 문제를 스스로 당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동안의 "전통"은 더 이상 각 개인들의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줄 수 없다. "집단성의 체계"가 유지되던 과거의 영광의 시대에서나 통하던 방법론들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앞두고서 기존의 종교들도 변화하고 개혁하고 성장해 나아가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인간은 하늘을 거스를 수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대단히 오해하고 있다. 그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순응하지 않으면 어차피 너는 죽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는 필연적이므로, 결국 따르고 정렬하지 않으면 희생되는 것은 개인이요, 사람이다. 개인은 세계를 당면할 수 없다. 개인은 자신의 삶조차도 제대로 당면할 수 없다. "주권"은 나에게 있지 않다. 이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 모든 영적 성장의 시작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에는 중심이 전환되어야만 한다. 집단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따라서, "신"과의 관계성 역시도 변화해야 한다 : "집단으로 신을 만나는 것에서 → 개인으로 신을 만나는 것으로." 이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하면서 이미 선언한 것이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날에는 "나 - 와 - 신", 이렇게 실존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로써 신을 만나고, 신 앞에 마주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중심으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달라지고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개인에게 주어진, 감당할 수 없는 각자만의 존재와 삶의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유의미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과의 관계성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이에 대해서, 나는 "보편적 복음주의"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 첫째, 보편성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길은 평등하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길을 걸어가는 자와 걸어가지 않는 자, 그리고 그 길을 오래 걸어야 하는 자와 비교적 짧게 걸어야 하는 자 등, 각자의 실존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길이 평등하게 다 열려 있다고 하여, 모든 이들이 그 길의 목적지까지 전부 다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각자 스스로 길을 걷지 않으면, 누구도 그 길을 대신 걸어주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보편성이다. 둘째, 내재성이다. 신을 만나고, 신과 교감하고, 신과 연결되고, 신과 하나되며, 신과 동행하는 모든 여정들은 철저하게 "나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동안 인류는 집단성을 우선시하였으므로 외재성, 그러니까 행위나 표면적인 것들에 신앙을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는 철저하게 나의 내면에서, 나의 마음에서, 나의 의식 안에서, 각자가 "홀로" 신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과제를 대신해주지 않는다. "나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중보해주지 않는다. 물론, 이때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그리스도와 성령까지도 포함되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교회도, 목사도, 사제도, 교황도, 제사장도, 성전도, 성직자도, 그 누구도, 나와 신의 내재적인 일대일의 관계에 대하여 중보해주지 못한다. 철저히, 홀로 마주서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원칙은 초월성이다. 유한하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3차원 시공간에 종속된 물질세계, 현상계에 속하는 그 무엇이라도 신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지 못한다. 특정한 사람이나 인물, 또는 특정한 대상, 특정한 요소, 특정한 장소, 그밖에 모든 물질적이고 상대적인 존재, 사건, 현상들은 "신"이 아니며, "신성"하지도 않다. 신은 오직 초월적인 존재(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히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이리 표현하겠다)이며, 신과 신성은 오직 "초월적인" 관계로서 나의 의식과 내면 안에서 마주하고 관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원칙 앞에서, 거의 대부분의 우상 숭배와 육적인 행위와 요소들은 전부 다 탈락하게 된다.


이를 하나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개인이, 자기의 내면에서, 초월적인 신(성)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보편적 복음주의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다. 나는 이 원칙에서 어긋나는 그 무엇과도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집단과 조직과 세력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 형식과 제도와 체계와 의례는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 오직 "개인이 자신의 내면 안에서 초월적으로 신을 만나는" 과정의 일부, 혹은 수단, 방편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 이제, 현 시대에서 신앙은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각자의 실존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아마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두렵게 할 것이다. 불편하게 할 것이다. 사람은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홀로 신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워하며, 자기의 존재와 홀로 마주서는 것을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를 미룰 수가 없다. 홀로되라. 홀로, 자기의 내면으로 돌아와라. 그 내면의 깊고 은밀한 곳에서, 신을 영접하라.


나는 더 이상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에 속하여서, 특정한 종교만의 배타적이고 특수적이며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신과 신성과 진리를 논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내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분"이시며,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란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 안에 계시는 신성 그 자체"이시며, 내게 있어서 성령이란 "각 영혼들을 이끌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 그 자체"이다. 따라서, 신과 신성은 초월적이며, 근원적이며, 인류 보편의 원형 그 자체이다. 다만 이것을 나타내는 여러 상징과 신화와 원형들 중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하기를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잠시 빌려와서 이 인류 보편의 원형적이고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신과 신성을 설명하고 표현하며 신앙의 길을 걷기를 선택하고 결정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원형"에만 속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일 것이며, 그 어떤 상징과 교리와 가르침과 전통에 대해서도 적극적이고 유연하게 연합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류 보편의 원형"으로서의 신과 신성과 진리가 아닌, 특정한 인물끼리만, 특정한 단체와 조직과 세력끼리만, 특정한 물질적/상대적/특수적/역사적 요소나 대상이나 영역에만 한정하여 신과 신성을 말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 안에 계신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내 안에 계신다.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곧 신앙이며, 나의 신앙은 이제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철저히 혼자가 되라. 외로움과 홀로 있음과 고요와 함께, 나의 내면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계시는, 초월적인 신성을 영접하라.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길을 걷기 시작해야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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