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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묶인 인연

그 남자

by 아는 사람 가탁이

이십여 년을 한 지붕아래 살면서 늘 남의 편만 드는 한 남자가 있다.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그때, 그 남자는 그토록 좋아하던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찢긴 채로, 어쩔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만 보던 어느 날 그에게 불쑥 산책을 제안했다. 남들은 일상일 수도 있는 산책이 우리에게는 보기 드문 일이어서 그는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 "일은 무슨, 그냥 바람 좀 쐬러 가요" 누가 보면 남도 이런 남이 없을 정도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만 보며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걷다가, 나보다 키는 작지만 넓고 당당하던 어깨가 힘을 잃고 내려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잰걸음으로 몇 걸음 걸어가 그의 팔을 잡고 엉겁결에 손까지 잡아버렸다. "와 이라노?""당신이 안 하니까 더 늙어서 민망해지기 전에 내라도 함 해보는 기라요"


"이야 부부금슬이 장난아이네 우째 손을 다 잡고 가노?"어설프고 짧았던 연애시절에도 하지 않던 짓을 산책로 주변에서 남편이 회집을 하던 직장선배에게 딱 걸린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그 순간에.

결혼하고는 잡아보지도 잡아주지도 않던 손을 잡은 그 순간을 선배의 예리한 눈은 놓치지 않은 것이다. 하긴, 그 예리한 눈이 놓친 건 있었다. 그 순간 내 앞에서 둥그렇게 어깨를 말고 힘없이 걸어가던 남편의 뒷모습을 선배는 보지 못했으니... 남편의 둥근 어깨가 내 눈에만 보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잡은 손에 힘을 주어서라도 어깨를 한껏 들어 올려주고 싶었다.


다음 날, 사무실에 찾아온 고객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전날의 사건을 털어놓았고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70대 중반인 고객의 경험 얹은 한 말씀에 아슬아슬하던 우리 인연은 다시, 더, 단단하게 묶이고 말았다.

"에헤이 인자 끝났네 끝났어 사람이 사람한테 측은지심 생기면 그 사람 못 버리는 기라"


아직 내가 버리지 못한 그 남자, 아직 모든 게 남의 편일 때가 많은 그 남자이자 나의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고 밤마다 코와 입으로 대포를 쏘아대며 숙면을 취한다.

그날 그 힘없고 작아 보이던 뒷모습에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도, 그 뒷모습과 함께 털어놓은 내 마음을 '못 버린다'는 한마디로 일축시키던 고객의 부탁 같은 당부도, 평생 남의 편으로 살아도 버리지 않고 손가락 끝만 잡아서라도 같은 곳을 보며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결심(?)도 모른 채...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애를 쓰는지
뒤돌아 보아 주세요
나 거기 서있을게요"

출발은 사랑이었으나 매일 애를 쓰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한 여자가 당신의 등 뒤에서
'의리'를 외치며 서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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