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사람이 가해자가 되었을 때

연인 사이 불법 촬영 사건과 3천만 원의 의미

by 대표변호사 이환권

변호사 생활을 3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떤 사건들은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다. 법리나 판례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이 남긴 질문 때문이다.


A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생각했다. 신뢰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A 씨가 겪은 일은 단순한 불법 촬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아온 칼날이었다.




믿음 너머의 진실


A 씨는 2010년대 중반 지인 소개로 B 씨를 만났다. B 씨는 지방에 살았고 A 씨는 서울에 살아서 일종의 주말 연인이었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커플들이 그렇듯, 두 사람은 사진과 메시지로 그리움을 채웠다. B 씨는 자신의 클라우드 계정까지 공유할 만큼 A 씨를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을 키워오던 어느 날, A 씨는 직장에서 B 씨의 클라우드에 접속했다가 자신과 B 씨가 관계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발견했다. A 씨는 촬영 사실을 전혀 몰랐다. 동의한 적도, 눈치챈 적도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우리 사무실을 찾아온 A 씨에게 나는 물었다. "언제부터 촬영했는지 아십니까?" A 씨는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보여준 게 전부인지도 확신할 수 없고요."





가해자의 전형적인 모습


A 씨가 이별을 통보하자 B 씨의 태도가 돌변했다. "나 그냥 뛰어내릴게"라며 극단적 선택을 암시한 것이다.집 앞까지 찾아와 울면서 용서를 구하다가도, 거절당하면 갑자기 화를 냈다. "내가 어디다 유포했어? 뭘 했어?"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성범죄 사건을 다뤘다. 그런데 가해자들의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고, 피해자를 가스라이팅하며,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A 씨는 영상 유포에 대한 두려움에 약 1년간 억지로 교제를 이어갔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결국 A 씨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B 씨는 그 후로도 "보고 싶다", "생각난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A 씨가 상처를 잊을 만하면 다시 괴롭혔다.




법적 대응의 시작


우리는 B 씨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고소장에는 불법 촬영 사실과 함께 유포 가능성에 대한 수사 요청을 담았다. 디지털포렌식을 통해 B 씨의 휴대폰에 다른 피해자나 추가 범죄 흔적이 있는지도 확인해 달라고 했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고, 증거들이 하나씩 확보되었다. B 씨는 처음에는 발뺌하려 했지만 A 씨가 보관한 영상 파일과 대화 기록 앞에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수사가 본격화되자 그제야 B 씨 측에서 합의를 제안해 왔다.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우리는 3천만 원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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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3천만 원인가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합의금 기준이 뭔가요?" 솔직히 말하면 정해진 기준은 없다. 보통 수백만 원에서 2천만 원 선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 사건에서 3천만 원이라는 금액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B 씨는 연인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악용했다. 신뢰를 이용한 범죄는 법원에서도 더 무겁게 본다.

둘째, 피해자가 무방비한 상태를 노린 범행이었다. 플래시까지 켜가며 촬영한 것은 매우 중대한 범죄 행위다.

셋째, 발견 후에도 가스라이팅으로 1년간 추가 피해를 입혔다.

넷째, A 씨가 직접 영상을 발견해 보관했고 카카오톡 대화 등 증거가 풍부했다.


법무법인 이현을 설립할 때 내가 세운 철학은 '사람중심'이다. 의뢰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의뢰인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A 씨의 사건에서도 그 원칙은 변함없었다. A 씨가 보관한 모든 증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의 심각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꼼꼼히 준비했다. 수사기관이 사안의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고소장 한 장 한 장에 공을 들였다. 합의 협상 과정에서도 A 씨가 겪은 고통의 무게를 정확히 반영하려 노력했다.




피해 직후, 해야 할 일들


만약 당신이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면, 절대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라. 가해자와 직접 만나는 것은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대신 이렇게 하라.


먼저 증거를 확보하라. 촬영물이나 대화 내용을 캡처해서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촬영 정황을 보여주는 모든 자료를 수집하라. 가해자와 주고받은 메시지도 백업해 두어야 한다.


둘째, 정신적 충격도 기록해 두라. 병원에서 진료받고 기록을 남기고, 일기나 메모로 피해 상황을 상세히 적어 두라. 주변 사람들이 본 당신의 변화된 모습도 증언이 될 수 있다.


셋째,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성범죄 전문 변호사와 상담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고, 성폭력 상담소에 연락하라.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합의는 성급하게 하지 마라.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에 서둘러 합의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 있다.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추가 피해 가능성도 확인한 후에 합의를 결정해야 한다.




법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3천만 원이라는 합의금이 A 씨가 받은 상처를 다 치유해 줄 수는 없다. 법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 씨는 사건이 마무리된 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이것이 아닐까. 피해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일 말이다.


내가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던 90년대에는 성범죄 피해를 입고도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피해자 스스로 자책하고, 주변에서도 조용히 덮으라고 눈치를 주는 분위기였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피해자가 자신을 탓한다. 왜 그 사람을 믿었을까, 왜 더 조심하지 않았을까. A 씨도 처음 우리 사무실에 왔을 때 그랬다.


그때 나는 A 씨에게 이런 말을 했고, 지금 이 글을 읽는 이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싶다.



잘못은 오직 가해자에게만 있다.





사람과 법 사이 그 애매한 틈에서 이야기를 씁니다.

법무법인(유한) 이현, 대표변호사 이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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