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추락하는 자존감의 한 귀퉁이라도 잡으려고 공모전에 응모했다. 감사하게도 2개가 당선되었고 그 이후로 아빠는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딸, 여보, 엄마 외에 나를 부르는 말이 있다는 게 낯설지만 설렜다. 도전을 계속하자는 생각에 아이를 재우고 공모전 사이트에서 응모할 분야를 찾아봤다.
첫째, 독후감 공모전. 책을 심도 있게읽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예전에 읽은 책으로 도전할까 고민해봤다. 하지만 오늘 아침 방송한 엘리베이터 점검도 잊고 신나게 집을 나선 기억력을 어찌하리오!
둘째, 시·소설 공모전. 감정에 휩싸여 시를 이해하지 말라는 교수님의 질책 후, 시는 가깝고도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긴 호흡의 소설을 쓰기엔 나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수기 혹은 수필 공모전! 수기와 수필을 저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담담하고 자신 있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잠에서 깬 아이에게 쏜살같이 달려갔다 까치발로 돌아와 다시 집중할 수 있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수기 공모전이 마감이었다. 허망함이 몰려오던 그때, 은퇴 이후의 삶을 다룬 공모전이 눈에 띄었다. ‘이건 아빠를 위한 공모전이야!’. 아빠에게 바로 연락했고, 마감 기한을 며칠 앞두고 아빠의 글이 완성되었다. 당신의 글을 누군가에게 보인다는 것이 멋쩍으셨는지 나에게 메일을 보내셨다.
어느새 나는, 먼저 글을 쓴 선배가 되어 있었다. 사명감이 끓어오른다. 회갑이 넘어 처음 공모전에 도전하는 후배를 꽃길로 인도하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빠의 글을 클릭했다.
나는 흔히 말하는 베이비부머로 1958년생이다.
내가 짐작한 글이 아니었다. ‘베이비부머’라는 용어까지 쓰며 이목을 집중시키다니! 이러다가 1등? 혼자 김칫국을 마시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도백 학원을 찾아가 원장과 상담을 했다.
‘몇 살이세요?’ ‘이제 60입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벌써 이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걸까? 나는 쓸모없는 고령자일 뿐인가? 제2의 인생이라 생각하며 의욕적으로 출발하려 했는데 실망이 컸다.”
이어진 아빠의 글을 읽자 모니터 앞이 뿌옇게 변했다. 처음 안 사실이다. 방에서 책만 본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은퇴한 아빠가 행복한 줄 알았다.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도 아빠의 어깨는 무거우셨나 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무능한 것 같다는 아빠의 글을 보니, 여행 한번 못 보내 드린 나의 무능함도 연거푸 몰려왔다.
혼자만의 사투를 벌인 아빠는 얼마 뒤, ‘장애 활동 보조사’를 시작하셨다. 복지관을 찾아가 사회에 보답하며 살 수 있는 일을 여쭤보셨고(정말 아빠답다), 장애우 돌보는 일을 제안받으셨다. 책을 사고, 아빠의 유일한 낙인 일주일에 한 번 맥모닝의 여유를 누릴 정도의 수당. 무엇보다 사회에 보답하며 일을 한다는 당신의 신념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아빠는 건장한 한 청년과 만남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