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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Dec 14. 2020

도와줘!

22개월 아이에게 인생을 배우다

저녁 9시. 하루 중 내 목소리가 가장 부드러운 시간. 빠른 육퇴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최대한 낮은 음정으로 아이를 토닥이며 섬집 아기를 부른다. 엄마가 섬그늘에~ ‘구울!’ 우렁찬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지입!’. '가사를 기억하다니... 영재?' 이럴 땐 나도 영락없는 고슴도치 엄마다.     


아이는 22개월이 되자 짧은 문장으로 말했다. ‘아빠 붕(자동차)이야’, ‘엄마, 푸아(풍선)’, ‘암툔(삼촌), 안녕’ 등. 그중 들을 때마다 설레는 말은 “엄마, 도와줘!”. 이 한마디면 아이의 어떤 방해에도 끝까지 고수한 고무장갑도 벗어던지고 사건의 현장(?)으로 갔다. 나는 도와달라는 말이 어렵다. 첫째라서 그럴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내가 무능하게 보여서일까? 아무튼 ‘도와주세요’는 쉽게 나오지 않는 말 중 하나이다.



돌이 지나고 아이 피부에 붉은 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시적으로 오르내리기를 반복해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집에서 소아과는 차로 5분. 택시가 잡힐 턱이 없다. ‘아참, 유모차가 있었지! 부드러운 핸들링으로 택시 못지않은 승차감을 선사하리라!’ 걱정과 달리 아이는 병원으로 가는 15분의 시간을 견뎌줬고, 진료도 무사히 마쳤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체력이 방전됐다. 카페인, 그가 필요했다.


한 손으로 카페 문을 연다. 오른쪽 날개 뼈나 등으로 스르르 닫히는 문을 지탱. 미어캣처럼 좌우 바퀴를 살펴 문턱에 걸리진 않는지 살핀다. 이후 문워크로 유모차와 혼연일체가 되어 들어가면 카페 입성! (자동문은 사랑입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점원에게 안전하게 들어왔다는 안도의 미소를 엷게 띠며, 아바라(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주문한다.


앉아서 기다릴 자리를 찾는 그 순간!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잔잔하던 카페가 우리 아이의 7단 고음으로 뒤덮였다. 챙겨 온 과자와 장난감도 통하질 않는다. 잠시 나갔다가 들어오려는데 이젠 유모차가 말썽이다. 아이가 온몸을 흔들며 우는 통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살폈다. 다시 고정하려면 양손으로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남은 손은 하나.     


도움을 구하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다가가 '죄송하지만...'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그들만이 누리고 있는 소중한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했다. 어쩌면 모르는 사람에게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용기가 부족해 핑곗거리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낑낑대는 나를 보며 한 여성분이 “제가 잠시 아이를 안아드릴까요?”라고 물어왔다. 별 빛이 내린다~ 샤랴랄라라랄라~ 연인을 만나면 들린다는 맑고 고운 종소리와 한 줄기 빛이 드려졌다. 고민할 시간도 없이 폴더인사와 함께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쳤다. 그분은 상냥한 목소리로 “저도 아이가 있어서요.”라고 답했다. 누구보다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그녀의 대답이, 먼저 도움을 요청한 그녀의 용기가 고마웠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하루였다. 기분 좋게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이미 나는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아이 키우느라 고생한다며 말을 건네는 분, 누구나 빨리 통과하고 싶은 마트 계산대에서 선뜻 양보해 주시는 분, 아이와 먼저 내리라며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시는 분 등. 지금껏 자존심을 내세우며 도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세상은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이의  말에서 이렇게 또 인생을 배운다.

그렇다면 나도 적용해봐야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퇴근한 남편에게 용기 내어 말해보련다.

“여보, 분리수거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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