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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만세?

by 재홍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예년보다 더운 6월의 초입, 햇빛이 강해 앞을 보려면 눈을 찡그려야 하는 날이었다. 전 날부터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거렸다. 집에서부터 커피를 열 잔은 들이켠 듯 가슴은 두근두근했다. 가만히 있으면 내 심장 소리가 들렸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탈의실에서 근무복으로 갈아입는 와중에도 등줄기에 땀이 배어났다. 이윽고 돌리고 싶지 않던 병동 문 손잡이를 잡았다.


병원에서는 신규 간호사의 적응을 돕기 위해 ‘프리셉터’ 제도를 운영한다. 약 3주 동안 ‘프리셉터’라고 불리는 선배 간호사가 신규 간호사와 일대일로 함께 근무하며 약물을 어떻게 섞는지, 환자 기록은 어떻게 작성하는지, 의사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연락해야 하는지 등 실무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하나하나 지도해 준다. 이 기간 동안 신규 간호사는 모든 업무를 프리셉터의 감독 아래 수행한다. 이 프리셉터 기간이 끝나면 신규 간호사가 혼자 근무해야 하는 날이 온다. 모든 판단과 행동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시간.


신규 간호사 독립의 날이다.


문제는... 그 긴장되고 두려운 독립 첫날, 내 환자가 CPR이 났다는 것이다. 갑자기 환자의 심전도가 평평해졌고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와 환자 주변에 모여들었다. 심장 마사지를 하는 사람, 약물을 재는 사람, 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 손은 덜덜 떨리고, 귀에서는 벌레가 들어간 것 마냥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속에서 무엇이 자꾸 올라오고 목젖을 자극하는데, 토할 틈조차 없었다. 숨을 들이쉬는 데 산소가 폐로 들어가지 않고 입에서 자꾸 맴돌았다. 전쟁터가 되어버린 자리에서 나는 들리는 지시대로 기구와 약물과 물품을 건넸다.


환자가 다시 맥박을 찾고,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사용한 약물을 청구하고, 환자 CPR 보고서를 기록하고, 바뀐 오더를 정리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날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저분한 비닐 포장지들, 피가 묻은 침대 시트, 부서진 앰플과 바이알들이 널려 있었다. 혼자 근무하는 첫날부터 집채만 한 파도에 휩쓸렸다. 나는 속절없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허우적댔다.


퇴근하고 24시간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무더운 30도의 날씨였지만, 뜨거운 것을 먹고 싶었다. 국물이 한 숟갈씩 들어가니 그제서야 차가웠던 몸이 덥혀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쏟아졌다. 해야 했었는데 못 한 일들이 하나둘씩 생각났다. 어떻게든 넘긴 하루를 안도하고, 불안해했다. 비로소 간호사라는 시작선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그날의 경험이 지금 나의 피와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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