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간호사에게 동기는 그야말로 빛과 소금이다. 같은 시기에 입사하여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험담을 이러쿵저러쿵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어쩌다가 근무가 겹친다면 마치 전쟁통에 만난 피난민이요, 만주에서 조우한 독립군이다. 대놓고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에는 여러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기에, 옆으로 다가가 팔을 건드려본다. 화들짝 놀란 눈이 마주치면 살짝 웃는다. 주머니에서 쪼그만 젤리나 과자 하나를 건네본다. 동기의 존재는 간호사의 영원한 직업병인 스트레스, 배고픔, 무언의 압박감 같은 것에 만병통치약이다.
동기의 존재는 의구심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프리셉터 기간이 끝나서 갓 독립한 신규들은 선배 간호사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헷갈리는 것을 물어보는 순간, “이것도 아직 몰라?" 나 "프리셉터가 이거 안 가르쳐줬어?"의 기가 막힌 이지선다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어떻게 얘기하든 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같이 근무하는 동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어본다. 어쩌면 병동에서 가장 친절한 선생님이 동기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최고의 맥주 파트너도 동기다. 너무 위중한 환자를 봐서 하루 종일 콩닥콩닥했다는 일, 인계가 너무 길어서 퇴근 시간보다 퇴근이 2시간 늦어진 하루, 첫 CPR 때 갈비뼈가 부서지는 느낌을 경험한 일 등 병동에서 일어난 일은 동기가 아니면 털어놓기 어렵다. 서로의 힘든 일을 하나씩 꺼내놓을 때면 동기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나도 그랬었어, 나도 그런 적 있어' 같이 '나도'로 시작하는 말들은 얇지만 튼튼한 밧줄같이 우리를 동여맨다. 자꾸 손이 가는 마른안주처럼 맥주와 함께 서로의 말들을 곱씹어 삼키면 응어리진 마음도 같이 날아가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기와도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겼다. 근무지가 달라지기도 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연락도 줄었다. 괜히 서운하고 섭섭했다.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에 속이 상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반가운 얼굴을 보고는 서로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깐의 인사였지만 여전히 서로를 응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삭막한 병원 생활에서 가닥가닥 몇 줄기의 빛이 동기였다. 그 따뜻한 빛의 힘으로 나는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나의 빛같은 벗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