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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일을 1시간에 말하려면

by 재홍

간호사는 24시간을 세 개의 근무로 나누어 일하는 3교대 근무를 한다. 근무와 근무 사이에는 '인계'라는 절차가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다음 간호사에게 내가 보고 있는 환자의 병력과 치료의 방향을 말해주는 일이다. 기저질환은 물론이고 주입되고 있는 약물이 왜, 어떻게, 무엇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활력 징후의 target 범위는 얼마인지, 보호자의 캐릭터는 어떤지 같은 정보들이 포함된다. 이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늘 빠듯하고 복잡하다.


신규 간호사에게 인계는 특히나 큰 부담이다. 자신의 일도 겨우겨우 해내는 상황에서 다음번 근무 간호사에게 설명까지 해야 한다. 자신감은 떨어지고 목소리는 작아진다. 인계를 주는 사람도, 인계를 받는 사람도 서로를 오해하기 쉽다. 근무 사이 인계라는 경계 지점에서 어쩔 수 없이 ‘의심’과 ‘추측’이 끼어든다. 얘가 이걸 제대로 했을까? 이 일이 의사에게 noti가 되었을까 하는 것들.


입사한 지 백일쯤 되었을 때, 나보다 병원에 오래 계신 선배 환자 분이 계셨다. 재원일 수만 200일이 넘는 분이었다. 그 환자 분의 인계노트는 감성 카페에서 인테리어로 쓸 만한 두께의 두꺼운 장편소설이었다. 드라마로 치면 100화가 넘는 사극 대하드라마. 다음 간호사 선생님이 그동안 그 환자를 본 적이 없어서 200일 치 첫 인계를 줘야 했을 때 그 참담함이란... 듣는 간호사 선생님도 고역이지 않았나 싶다. 1시간이 넘는 인계가 끝나고 입이 말라서 텀블러를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던 기억이 난다. 200일의 시간을 1시간에 담을 수는 없을뿐더러 그렇다 해도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오해하지 마시길. 인계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환자의 작은 변화 하나가 중대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병원에서는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어제 산소 포화도가 얼마였고, 밤사이 진행된 검사의 수치, 인공호흡기의 설정이 바뀐 이유 같은 것들은 다음 근무자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의무기록과 임상관찰기록에 남아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왼쪽 측위에서 산소 포화도가 떨어진다든지, 체위 변경 시 혈압이 요동친다든지, 주로 환자가 요구하는 사항이 무엇인지 같은 것들은 인계로만 들을 수 있는 정보다.


인계는 근무의 시작과 끝에 있는 시간이다. 정신없이 흘러가버린 하루를 되짚어 보고, 다음 사람에게 그 흐름을 넘겨주는 일이다. 단순히 언어로 환자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환자를 전체적으로 찬찬히 바라보게 된다. 다음 간호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생각하다 보면 내 마음도 정리가 된다. 그러다 보면 놓쳤던 수치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부족한 지식을 채울 수도 있다. 환자의 상태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인계는 결국 환자를 돌아보며 나를 위한 성찰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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