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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빈대떡 신사

해방 이후 빈대떡이 국민간식이 된 사연과 그 후

by 송지

평양 냉면집에서는 왜 사이드메뉴로 빈대떡을 팔까? 이 칼럼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서울분들이고, 친정에서는 늘 명절이면 빈대떡을 꼭 부쳤다. 시댁 어른들은 이북분들이다. 시어머님은 평안도 분이신데 우리 주변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빈대떡 명인이시다. 친정에서는 구색이던 빈대떡이 시댁에서는 명절 먹거리의 메인메뉴다.


1940년대에 발표된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라는 유행가가 있다. 이 노래 속 빈대떡집의 손님들은 대부분이 빈자가 아닌 말쑥하게 차린 문화인 신사들이었고, 카페나 바에 갈 형편이 안 되어 빈대떡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인 1947년 <경향신문>에 실린 "날로 번창하는 빈대떡집 이야기"라는 기사는 당시 서울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빈대떡은 어디 음식이고 언제부터 어떻게 우리 식탁에 자리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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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길거리까지, 빈대떡의 여행

17세기 조선시대 궁중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내놓은 음식을 기록한 《영접도감의궤》(1634)를 보면 녹두를 갈아 참기름에 지져 낸 것으로 보이는 녹두병(綠豆餠)이 등장한다. 1920년대 출간된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도 빈대떡은 나라의 제향에도 쓰이는 음식이고 재료로 보아 가난한 사람의 음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녹두에 꿀을 섞은 팥소나(17세기, 음식디미방) 밤소를(19세기 초, 규합총서) 넣어 지진 떡 내지 부꾸미처럼 만들었다. 20세기 들어서는 미나리나 배추 정도만(1917년, 조선요리제법) 간단히 섞어서 부치다가, 점차 김치와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다양한 재료를(1924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섞어서 만들게 되면서 오늘날의 조리법에(1948년, 우리음식) 이르렀다.


빈대떡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다. 15~18세기 문헌을 근거로 한 일부 연구에서는 '빈대떡'의 '빈대'가 '병저'의 중국어 발음인 '빙져'에서 '빙쟈'로, 다시 '빙자'로, 그리고 '빈자', 마침내 '빈대'로 변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병저'는 밀가루나 곡물가루로 둥글납작하게 만든 반죽을 지져서 먹는 것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또 다른 설로는 손님을 접대한다는 뜻의 '빈대(賓待)'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나, 서울 정동에 빈대떡 장수가 많이 살았는데 당시 이곳에 빈대가 많아 빈대골이라 불렀기에 빈대떡이라 불렀다는 민간 전승도 있다. 다만 이러한 어원설들은 아직 학계에서 정설로 확립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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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실향민과 함께 변한 빈대떡

해방 1년여 전부터 해방 후 4년여 동안 서울은 재외 동포, 월남한 이북 사람들, 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현재 서울에 유명 노포 냉면집이 밀집되어 있는 명동, 충무로, 퇴계로, 필동 일대는 식민지 시기 서울의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는데, 해방 즈음 일본인들이 떠난 이 지역의 집들은 돈 있는 외지인들로 금세 가득 찼다. 한편, 돈 없는 외지인들은 종로와 을지로 사이 청계천 일대로 몰려들었다.


청계천변 판잣집촌에는 조선총독부가 남겨놓은 물자, 미군이 풀어놓은 먹거리, 시루떡이나 설렁탕 등을 판매하는 길거리 음식 좌판이 즐비했다. 가스나 연탄 없이도 화덕이나 숯불로 쉽게 조리할 수 있는 빈대떡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사정의 여성들에 의해 청계천 주변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남대문시장, 종로, 을지로 등 상권이 인접해 있어 식사나 안주거리로 찾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빈대떡의 인기에는 녹두가 쌀에 비해 월등히 저렴했던 것이 한몫했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빈대떡은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이었다.


물론 이 빈대떡은 각종 재료가 들어가는 고급 빈대떡은 아니었을 것이다. 녹두에다 미나리나 파를 썰어 넣고 만든 정도였다. 그러나 빈대떡은 해방 이후 집에서는 물론 노상에서까지 도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만큼 성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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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식과 이북식의 만남

빈대떡은 황해도와 평안도 등의 서북 지방에서 많이 해 먹었던 간식으로 평안도의 빈대떡은 그곳 명물 음식 중 하나였다. 실향민들의 구술에 따르면 평안도식 빈대떡은 서울식보다 훨씬 크고 두툼하다고 하며, 일부 자료에서는 '크기는 약 3배, 두께는 2배 이상'이라고 언급되기도 했다. 평안도·황해도 일대의 빈대떡은 고기와 숙주 등을 듬뿍 넣은 영양 보충형 반찬 또는 술안주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서울의 빈대떡은 제례용 및 손님접대용으로 고기와 숙주 외에 김치를 포함한 다양한 고명을 얹어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와 크기도 이북식에 비해 비교적 작고 얇다. 조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 음식으로, 설렁탕·해장국과 함께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서울의 명물 먹거리였다. 옛 주막의 해장국상에 빈대떡이 빠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만들기 쉽고 맛있어 널리 유행했다.


월남 이후 실향민들이 서울에 정착하면서
그들의 스타일이 기존 서울 음식에 영향을 주었다.
즉, '서울 전통의 빈대떡'과 '이북식 빈대떡'이
해방 후 청계천, 피맛골, 시장 등을 매개로 융합되어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냉면집 사이드메뉴가 된 이유

서울식과 이북식 빈대떡의 융합은 자연스럽게 냉면집의 사이드 메뉴로 이어졌다. 1950년대 강산면옥(대구)과 1965년 대동강식당처럼, 실향민이 운영한 평양냉면집에서 녹두빈대떡을 함께 판매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식당은 냉면과 빈대떡을 같은
'이북의 맛'으로 묶어 손님상에 올렸다.

해방 이후 실향민 냉면집에서 빈대떡은 단순 부식이 아니라 수익 구조의 중요한 축이기도 했다. 냉면만으로는 주류 판매와의 연계가 어려웠지만, 빈대떡은 술안주로도 훌륭해 매출을 보완했다. 1950~70년대 서울·평양식 냉면집에서는 만두 대신 빈대떡을 내는 경우가 흔했다. 지금도 인천의 황해도식 냉면집인 '백령면옥'과 '사곶냉면'에서는 빈대떡이 인기 사이드 메뉴다.


일부 평양냉면집에서는 냉면과 함께 빈대떡, 만두, 어복쟁반을 '종합선물 세트'처럼 내놓기도 한다. 이는 한 그릇 냉면이 단품 식사에서 접대·회식 메뉴로 확장된 현재의 소비 방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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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된 빈대떡

빈대떡의 인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급감했다. 1967년부터 녹두값이 매년 급속하게 상승한 탓에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의 떡이 아니었다. 벼농사 위주로 녹두의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려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국내산 녹두는 가격이 상상 이상으로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또한 먹거리가 풍족해져 빈대떡의 자리를 차지할 새로운 간식들이 많이 등장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제 빈대떡은 일상의 주전부리보다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토 음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때 온 장안을 풍미하던 빈대떡은 이제 노포(老鋪)와 전통시장 속에 명맥을 잇는 역사적 음식이 되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뉴트로(New-tro) 문화로 이어지며, 과거 빈대떡집에 얽힌 정취를 찾아 나서는 젊은 층도 늘어났다.


결국 냉면집에서 빈대떡을 파는 이유는,
실향민 전통과 서울식 음식 문화의 융합, 그리고 경제적 필요가 맞물린 결과다.
오늘날에도 빈대떡은 냉면집에서 단순한 곁들이를 넘어,
한 시대의 음식사를 함께 전하는 메뉴로 남아 있다.


비 오는 날이면 지글지글 기름에 부쳐내는 빈대떡과 한 사발 막걸리를 떠올리는 것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MZ세대들에게까지도 문화적으로 유전된 우리의 정서일 것이다.


출처 : 한식문화사전, 백년식사, 문학이 차린 밥상 외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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