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 음식이 사철 음식이 되기까지_평양냉면의 변천과 지역별 냉면의 분화
평양냉면이 원래는 한겨울 밤에 살얼음이 언 상태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던 야식이었다는 것쯤은 이제 냉면 애호가들의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여름 대표메뉴인 평양냉면이 과거에는 왜 겨울음식이었는지, 한철 음식이었던 냉면이 어떠한 연유로 사시사철 먹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한, 평양냉면이 서울로, 평양보다 더 북쪽으로 혹은 서울보다 더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어떤 진화를 거쳤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알지 못한다. 이제부터 평양냉면 맛집에 가서 냉면 한 그릇을 시원하게 들이킨 후 "이 집 대박인데!" 이상의 멘트를 던져볼 수 있는 세련된 교양인이 되기 위해 냉면의 사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한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평양냉면은 메밀국수를 무김치나 배추김치 국물에 말아 돼지고기 편육을 얹은 것을 말한다. 즉, 메밀국수와 김치국물이 냉면의 필요조건이라는 뜻이다.
메밀은 밀을 수확한 이후인 7월에 파종하여 10월에 수확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입추 전후에 파종을 해서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을 했다. 당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는 한여름에 밀을 수확해 만두와 함께 국수를,
겨울이 되면 늦가을에 추수한 메밀로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이는 19세기 중반에 출간된 당대의 세시풍속을 소개한 책인 『동국세시기』에서 '냉면'을 음력 11월(지금의 12월)의 시식이라고 한 배경 중 하나다. 즉, 메밀을 늦가을 이후에 얻을 수 있기에 냉면을 겨울에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평양 사람들은 겨울과 봄에 냉면을 먹었다.
한겨울에는 뜨끈한 아랫목에서, 봄에는 대동강변을 내려다보면서
냉면 맛을 즐겼다고 전해지지만 겨울냉면을 진짜 냉면으로 쳤다.
겨울냉면의 묘미는 바로 살얼음이 낀 육수다. 평양에서는 이 육수를 위해 냉면용 김치를 따로 담갔다고 한다. 김치국물이 바로 냉면육수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양지 육수를 넣어 맵지 않은 물김치를 담그거나 익힌 소고기나 돼지고기 덩어리를 넣어 동치미를 담갔다. 그리고 추운 겨울 장독에서 쨍한 맛의 동치미를 살짝 언 상태로 보관했다.
1920년대에 들어 평양 사람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냉면은 여름철 별미로 재탄생했다. 메밀의 수확시기는 예나 그때나 바뀐 것이 없는데 말이다. 조선시대 평민들은 한여름에 얼음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고, 1910년에 식민지 조선에 냉장고가 들어왔으나 1970년대까지도 냉장고에는 냉동기능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으로 1920년대 평양에서 여름에도
살얼음이 언 한겨울 냉면 맛을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변화의 핵심에는 '얼음'과 '아지노모토'가 있었다.
1913년에 기차를 타는 승객들에게 시원한 음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서울과 평양에 제빙공장이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서울과 평양에서는 한여름에도 얼음덩어리를 구할 수 있었고, 냉면과 함께 빙수가 유행을 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 사시사철 냉면을 판매할 수 있게 되면서 평양 시내 곳곳에는 수십 곳의 냉면집이 개점을 하게 된다. 이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부터 평양지도에는 대동강변 향동 일대에 냉면거리가 표기될 정도로 익숙한 외식메뉴였지만, 보통 10월에서 늦으면 5월까지만 영업을 했던 것과는 다른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평양 시내에 수십 곳의 냉면집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이 늘어나면서 면옥노동조합까지 결성되었고, 1925년 1월에는 조합원이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평양면옥조합과 면옥노동조합은 노동환경과 처우개선 등의 문제로 마찰을 빚으며, 1931년에는 임금 삭감을 이유로 평양시내 냉면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냉면 판매업이 당대 평양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제빙공장의 등장으로 평양뿐 아니라 1920년대 서울에서도 여름 냉면이 큰 인기를 얻었다. 청계천 북쪽에 40여 곳의 냉면 전문점이 성업을 이루었는데 평양에서 일류 냉면기술자를 데리고 와 개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낙원동, 광교, 수표교, 돈의동 외)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겨울 냉면의 묘미는 육수이고,
이 육수의 핵심은 감칠맛이다.
선조들은 이 감칠맛을 위해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덩어리째 혹은 고기 국물을 넣어 물김치를 담갔다.
고기에는 풍부한 감칠맛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기는 먹고 싶다고 아무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감칠맛에 대한 갈증은 커졌고, 고기의 감칠맛을 얻기 위해 여러 방법이 고안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감칠맛을 얻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은 감칠맛이 풍부한 재료를 찾아 오래 끓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감칠맛은 고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채소의 국물에도 감칠맛이 제법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칠맛을 얻는 방법이다. 음식을 오래 끓인다고 단백질이 분해되어 감칠맛 성분이 크게 증가하지는 않는다. 오래 끓이는 방법보다 효과적으로 단백질을 분해하는 방법이 미생물의 효소를 이용한 발효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감칠맛의 상승 작용이다. 한 가지 재료만 쓸 때보다 여러 가지 재료를 함께 쓰면 사용량에 비해 감칠맛이 엄청나게 증폭된다. 이러한 감칠맛의 시너지 효과는 다른 맛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현상이다.
평양 냉면의 육수는 바로 이런 감칠맛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육수와 동치미(김치) 국물을 혼합해서 맛을 냈다.
이래야만 동물성 단백질에서 나온 감칠맛이 채소와 발효를 통해 얻은 김치국물과 만나 감칠맛의 시너지를 이뤄 최고의 냉면육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치미 국물은 겨울에 담가 저온에서 천천히 익혀야 시원하고 깔끔한 맛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데, 여름에는 기온이 높아 발효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맛이 쉽게 쉬거나 상했다. 여름에 냉면을 만들어 팔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런 동치미 국물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한 것이 1915년에 조선에 등장한 '아지노모토'다.
1908년 일본에서 개발된 아지노모토는 조선에 상륙 이후 한동안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평양의 냉면집에서는 닭고기 육수에 아지노모토를 넣어 냉면 육수를 만드는 집들이 늘어났다. 평양의 냉면집 32곳의 지인들을 모아서 면미회와 아지노모토회를 결성하기도 하고, 아지노모토사가 직접 평양에 냉면집을 운영하기도 한 것이 그 성과였다.
아지노모토사는 한여름에는 냉면집에서 동치미를 만드는 데 원가 부담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원래 냉면은 동치미와 고기육수의 적절한 배합이 국물 맛의 비결인데 여름철에 동치미를 담글 수가 없어서 대중이 원하는 육수 맛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는데, 아지노모토를 해결책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맛도 맛이지만 아지노모토를 사용하면 훨씬 경제적이었다. 아지노모토도 매우 비싼 편이었으나 편리성이 그 가치를 뛰어넘었다. 동치미를 담그는 것보다는 원가도 더 낮아질 뿐더러 아지노모토 육수가 더 자극적이고 맛이 있어 고객들이 선호했기 때문이다. 결국 평양 냉면의 국물 맛은 아지노모토에게 지배당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의 평양냉면은 50이 넘어도 아직 그 진가를 실감하지 못하는 '슴슴한' 맛을 자랑한다. 면도 100% 메밀이냐 아니냐가 냉면집의 평가기준이 되기도 한다. 서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평양냉면의 맛은 실향민들의 추억 속 그것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월남한 실향민들이 만든 냉면집—을지면옥, 우래옥, 필동면옥 같은 곳—들은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며 그 맛을 재현했다. 그들의 냉면에는 1950년대 이전 평양 냉면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오히려 현재 평양의 냉면은 변화된 맛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1960년대의 평양랭면은 간이 강하지 않아 맹물에 국수를 말았나 할 정도, 고명도 간단했으나 1980년대 이후 베이징, 선양을 비롯해 세계 각지의 옥류관 해외 지점의 평양랭면은 화려하고 간도 강해졌다. 북한의 대표 냉면집인 옥류관 냉면은 감칠맛이 강하고 육수도 진하며 달큰한 편이라는 평가다. 또 옥류관의 면발은 감자·옥수수 전분 비율이 높아 쫄깃한 편이라고 한다. 기호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고, 관광객이나 외빈 접대용으로 발전한 요리 문화의 영향일 것이다. 옥류관은 북한 정부가 민족음식을 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0년 8월 평양 대동강 기슭 옥류교 근처에 설립한 곳이다.
얼마 전 친구가 백두산에서 연변 냉면을 먹고 진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기가 막히다는 평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도 '연변 냉면'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동북지역 조선족 스타일의 냉면이 소개되었다. 육향 진한 육수, 매콤달큰한 양념과 쫄깃한 전분면의 조합은 한국의 젊은층에게도 중독성 있는 맛으로 각인되는 중이다.
연변냉면은 간도 이주민의 음식유산이다.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조선 북부 지역(함경도, 평안도)의 농민들이 러시아·만주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다. 이들이 자신의 향토 음식인 냉면을 만주 지역(현재의 연변)에 정착시킨 것이 연변냉면의 기원이다. 연변에는 특히 함경도 출신 이민자 비율이 높았고, 이들이 만들어 먹던 냉면 스타일은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의 중간형이었다. 진한 육수와 톡 쏘는 식초·겨자 맛, 메밀보다는 감자·전분 비율이 높아 쫄깃하고 탱탱한 면발이 연변냉면의 특징이다.
연변냉면이 이주민들의 생존 의지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보여준다면, 한반도 남쪽에서는 또 다른 맥락의 냉면이 탄생했다. 북부지방의 냉면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남도의 독자적 냉면, 바로 진주 냉면이다. 진주냉면은 경남 지역의 잔치국수와 평양냉면의 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경남 지역의 향토식 재료와 잔치문화가 결합해 탄생한 변형 냉면으로, 그 유래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기에 진주교방에서 술을 마신 후 입가심으로 제공된 음식이라는 설과 일제강점기 무렵에 진주에 평양 출신 이주민들이 세운 냉면집들의 평양냉면이 진주지역 재료와 식습관과 만나 로컬라이즈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진주냉면의 특징은 남도의 새우, 멸치, 다시마, 바지락 등으로 끓인 해산물 육수와 채썬 육전, 잘 익은 다진 배추김치, 황백 지단, 오이채, 잣, 실고추 같은 화려한 고명이다. 면발 또한 메밀과 전분을 혼합한 면으로 서울식보다는 식감이 탱글하다.
이 글을 쓰며 다시금 실감했다. 한국 사람들의 냉면 사랑이 얼마나 깊고 극진한지를. 한 그릇의 냉면에도 계절과 시대, 지역과 이주의 사연이 스며 있다. 그 이야기를 알고, 한 젓가락을 떠올릴 수 있다면—우리는 단순히 '맛있다'고 평가하는 '맛' 소비자가 아니라 한 시대의 식문화와 기억을 함께 음미하는 미식인이 될 수 있다. '이 집 대박이네!'에서 멈추던 감상이 맛의 구조와 재료의 특성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냉면을 통해 우리 선조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
냉면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국인의 적응력과 창조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계절의 제약을 기술로 극복하고, 분단의 아픔을 음식으로 달래며,
이주의 경험을 새로운 맛으로 승화시킨 우리의 이야기가 그 안에 있다.
이번 여름은 앞으로 맞이할 여름 중 가장 시원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살아온 날들 중 가장 더운 여름이다. 그런 날, 냉면 한 그릇이 몸을 식히는 음식이자 마음을 식히는 지적 위안이 된다는 걸, 올 여름 들어 처음 알았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가능한 한 자주 냉면을 먹어야겠다.
출처 : 백년식탁, 조선의 미식가들 외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