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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커피를 사랑한 왕들

전쟁 영웅과 음식(2) : 술레이만 1세와 프리드리히 2세 그리고...

by 송지

커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커피에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듯하다. 이른 아침잠을 깨우기 위해, 일을 시작하기 전에 혹은 일을 하던 중에 엔진에 시동을 걸듯, 잔뜩 스트레스받은 심신을 쉬게 하기 위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잔뜩 먹은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쾌락을 위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에 의지한다.

21세기 한국은 카페 왕국이다. 커피 한 알갱이도 얻을 수 없는 좁은 나라에 카페는 골목마다 넘쳐난다. 내가 일하는 대학의 외식경영학과를 찾는 한 해의 입시생 중 절반 가량이 바리스타를 꿈꾼다. 비단 현재뿐이 아니다. 과거에도 우리의 조상들은 커피를 사랑했다. 구한말 한국에서 커피는 신분을 막론하고 애정하는 기호품이었다. 일례로 고종 황제는 커피를 매일 마실 정도로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커피 원산지는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다. 염소를 키우던 목동이 한 염소가 커피콩을 먹고 힘차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커피가 피로해소 효과가 있음을 알아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9세기 무렵부터 아랍 상인들을 거쳐 이슬람 지역으로 전파되던 커피는 바다 건너 예멘으로 전해졌다. 15세기 전반에는 예멘의 수피 교단의 수도사들이 늦은 밤 기도시간까지 졸음을 쫓는 용도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15세기 후반 즈음부터 이슬람 세계로 점차 퍼져나가 서민들까지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후 커피와 그 효능에 대한 정보가 아랍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15세기말 커피는 아랍 북부로 북상해 메카로, 16세기 초에는 카이로에 진출하기 이른다.

오스만제국의 황금기를 이룬 술탄은 술레이만 1세로 제10대 술탄이다. 그가 술탄으로 즉위한 당시 오스만제국은 흑해 북부와 도나우강 이남의 거의 전 지역에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술탄이 되자마자 이스탄불에 억류되어 있던 이집트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자손을 비롯해 이집트의 주요 인사와 상인들을 풀어주었다. 또 페르시아 상인과 장인들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비단 무역을 중심으로 이란과의 교역활동을 재개시켰다. 한편, 제국의 법제체제를 확실히 정비해 '입법왕'이라 칭송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세계 정복자 타이틀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그는 계속해서 동지중해의 패권확대를 목표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군사, 행정, 종교의 균형을 모색하며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다. 수도 이스탄불에 다양한 건축물을 건설하고 16세기 유럽에서 손꼽힐 만큼 많은 인구를 보유하였다. 술레이만 1세 통치 하의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일대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그리고 아랍권의 대부분(모로코 제외),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예멘까지 이르렀다.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를 제국 전역에 연결된 교통로를 활용해 공급받던 이스탄불은 각지의 진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술레이만 1세(1494-1566)는 즉위 직후에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발을 진압해, 이집트 통치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북아프리카에서 이스타불에 이르는 교역로가 안정되자 16세기 중반에 커피는 이스탄불에 마침내 등장했다.

술레이만 1세는 커피가 여러 아랍국가에서 인기가 높은 반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아주 비싸게 팔린다는 것을 알고
커피 농사를 장려했다.
이로 인해 커피를 서민들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커피 유통경로가 자리 잡히자 1550년대 알레포 출신의 두 아랍인이 커피가게를 이스탄불에 열었다. 카페의 인기가 높아져 당시 이스탄불에 600여 개의 카페가 생겨나고 봇물 터지듯 커피의 물결이 유럽세계로 전파되었다.


1575년에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커피음료가 만들어진 것으로
유럽의 커피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커피와 초콜릿, 그리고 홍차 등
새로운 기호품이 아시아와 남미로부터 유럽으로 전해졌다.
커피는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1600년대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를 휩쓸고
1665년 빈에 전해졌다.

프랑스에서 커피가 확산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오스만제국의 외교사절이었던 '솔리만 아가'에 의해 오스만 스타일의 커피가 파리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의 거처에 방문하는 파리의 귀족들에게 연일 커피를 대접했고, 이후 커피를 접해본 그들이 자신들의 손님 접대에 커피를 제공하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마르세유의 커피 하우스에서 파리로 전해졌다는 설 등도 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아침에 수프 대신 커피를 마셨던 유럽 최초의 군주다. 이는 그 당시 시대적인 유행의 최첨단에 선 것을 의미했다. 사실 그 음료가 커피였는지, 초콜릿차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둘 다 모두 이국풍의 고급 음료였다는 것이다. 부왕이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17세기 프랑스 퀴진의 상징으로 코스 요리의 맨 처음에 제공되는 포타주(수프)를 점심과 저녁식사마다 여러 그릇 먹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7세기 말경 파리에는 '르 프로코프'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고
이것은 유일한 카페였다.
그러나 1721년에는 300개 이상, 700개,
18세기말에는 무려 2천 개가 넘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카페에서는 처음에는 커피만 팔다가
각종 차, 기타 음료, 과자와 아이스크림과 같은 디저트,
그리고 가벼운 식사도 팔았다.

커피 소비의 증가로 점차 프랑스에서 수프의 소비도 감소했다. 그럼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카페가 왜 대유행을 했을까? 그 이유는 신분의 차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 문인들, 부르주아, 상인, 심지어 서민들까지도 잘 차려입고 돈을 지불할 능력과 시대적인 예의를 지킨다면 누구나 카페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집 안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에게도 카페 출입은 허용되었다. 카페의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좋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독일에서 커피가 처음 유행한 것은 1670년대라고 한다. 함부르크, 브레멘, 쾰른, 그리고 라이프치히에 커피하우스가 생기면서 대도시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커피가 퍼져나갔다. 이후 독일 북부와 작센 지방을 중심으로 커피가 유행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무렵에는 상류층뿐만 아니라 시민층과 농촌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때부터 커피는 계층에 관계없이 누구나 즐기는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다.

커피가 크게 인기를 끌었던 곳은 대학도시였던 라이프치히(작센지방)였다. 이곳에는 지식인과 학생이 많았던 탓에 커피하우스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1730년대에는 이곳의 커피하우스가 8곳이나 되었는데 바흐가 작곡한 <커피 칸타타>가 이들 중 한 곳에서 1734년에 초연되었다. 이후로 라이프치히는 커피하우스의 도시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뽐내게 되었다.

이렇듯 프리드리히 대왕이 통치하던 프로이센에서는 커피가 대도시, 상류층만 아니라 농촌과 서민들까지도 즐기는 일상음료로 자리 잡았다. 독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은 프로이센 왕국의 3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다. 그는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7년 전쟁 등을 통해 그가 강대국 오스트리아에게서 슐레지엔 영유권을 확보해고 프로이센은 강대국의 길에 한발 다가서게 되었다. 그는 고문을 원칙적으로 폐지하고 출판의 자유, 결혼의 자유, 신앙의 자유와 같은 계몽주의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 자신을 '국가 제일의 공복'이라고 칭하며 계몽 정신을 수반한 국민과 국가를 위한 통치를 펼쳤다.

이 시기 커피의 급격한 수요 증가는 수입을 증가시켜 국부의 유출을 초래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 및 7년 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1777년에 커피 금지령을 내렸다.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커피의 소비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프로이센에서는 커피 관세를 대폭 올리고
정부에 의한 커피 로스팅 독점과 허가제를 시작했다.

그는 국가적 차원에서는 커피 금지령을 내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커피를 몹시 좋아하는 애호가였다. '오늘 아침은 겨우 예닐곱 잔... 그리고 점심 식사 후에는 한 냄비만'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에 40잔을 마시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커피 제조 방법은 매우 특이했다. 끓인 스파클링 와인으로 커피를 우려내고 풍미를 강화하기 위해 후추와 겨자를 넣어 마셨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오스트리아 빈에 커피가 전해진 것이 다름 아닌 '전쟁'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1683년 오스트리아를 두 번째로 침공한 오스만제국 군대가 남긴 전리품이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정복을 포기하지 못한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메드 4세가 15만 대군을 빈으로 보냈고, 고작 1만 5천의 오스트리아 군대는 이들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오스만 군대의 포위망은 점점 강력해졌고 비엔나 성안의 사람들의 굶주림은 극심했다. 이에 신성로마제국군과 당시 유럽 전역에서 무적의 부대로 명성을 떨치던 기마부대 윙드 후사르를 포함한 폴란드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해 출정했다. 마침내 8만 4천 명의 동맹군이 빈을 침공한 오스만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이때 후퇴하던 오스만제국 군대가 두고 간 보급품에 커피콩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쿨스지스키'는 오스만 군대에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커피콩을 볶고 우려내 커피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후퇴하던 오스만 군대에서 용케 탈출한 그가 비엔나로 돌아와 커피 만드는 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커피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각국에 널리 퍼져있다. 다음 이야기는 커피가 어떻게 유럽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각계각층에서 이국의 음료, 커피를 이용하기까지 지원군이 있었으니 과연 무엇이었을까?(계속)



출처: 맛있게 읽는 세계사,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음식 잡학 사전, 미식 인문학


이범준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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