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쌀쌀해지고 하늘은 흐렸다. 일기예보처럼 비가 오려나 보다. 강릉으로 출발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분에게 추천받은 '휴휴암'에 도착했다. 이름만 보고 바위인 줄 알았는데 사찰이었다. 큰 바위 위에 지어진 절이었다. 이곳에는 지혜관세음보살이 있다. 책을 들고 있는 보살님이다. 공부를 못하던 이는 공부를 잘하게 되고, 지혜롭지 못한 자는 지혜를 얻게 된다. 필요하다면 이곳 휴휴암에 방문하여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 보살 앞에 합장을 한 채 눈을 감았다.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로서 기도를 짧게 드렸다. 기도가 닿았는지 여행이 끝난 뒤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도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파도는 애꿎은 바위를 여러 번 때렸다. 심란한 마음도 단번에 잠재우는 소리였다. 그 파도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존재가 있다. 바로 갈매기였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매기가 내 처지 같아 계속 바라봤다. 저 갈매기는 어떤 연유로 부동한 채 바다만 응시하고 있을까. "너도 나처럼 큰 고민이 있는 거니? 그 고민이 무엇이든 잘 해결되길 응원할게."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영진해변에서 맨발로 걷는 부부를 만났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부부였다.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포'를 추천받았다. 근대화박물관이 잘 되어 있다며, 일제강점기 시절을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목포 사람이 친절하여 한 번 더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골 질문이 이어졌다. "걸어서 여행하는 이유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에겐 궁금증이겠지만, 내겐 부담스러운 커다란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고민하게 된다. 무거운 진심을 꺼내야 할지, 아니면 가벼운 대답을 해야 할 지 말이다. 아마 거대한 가방을 맨 채 걷는 행색이 그런 질문을 끌어내는지 싶다. 고민 끝에 답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요." 대답을 들은 그는 예수 이야기를 꺼냈다. 예수도 30대부터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전혀 상상치 못한 일들을 해내며 위대한 사람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괜스레 가슴이 들끓었다. 시기가 비슷하고 30대부터 달라질 이유는 충분했다.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예수처럼 위대한 사람이 되기보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아홉수는 무슨 마법에 걸린 듯 이상하게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솟는 시기였다. 내게 “얼른 떠나”라고 부추겼다. 회사가 싫어졌고 밴드 오아시스(Oasis)에 푹 빠져 ‘Whatever’와 ‘Live Forever’를 매일 들었다. 데미안 전시회는 마지막 퍼즐이었다.
‘뭔가를 간절히 원해서 발견한 것이라면, 그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의 필사적인 소원이 필연적으로,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그렇게 나는 퇴사했다. 아홉수가 퇴사하면 벌어지는 일, 삶을 흐르는 강물에 맡겼다. 길 위에서 가장 행복한 나는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