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옅은 빗방울이 내렸다. 폭우에 대비해 우비를 구매했지만, 오늘은 쓸 일이 없을 듯했다. 팔당 2리 충전 아저씨에게 추천받은 경포대로 향했다. 저 멀리 송림에 가려진 경포대가 보였다. 경포대로 올라가는 길목엔 아직 가을 향기가 존재했다. 여전히 물든 낙엽은 질 줄 몰랐다. 경포대에서 경포호를 바라봤다. 거묵한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경포호에 하늘색이 입혀지는 순간이었다. 그걸 본 순간 내 머릿속 구름도 걷혔는지 흐릿한 누군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는 옛 기억일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펼쳐본 일기장에서 발견한 기억처럼 다시 덮으면 잊는 그런 기억 말이다.
선교장에 도착했다. 배로 다리를 만들어 경포호를 걸어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조선의 풍류와 시인, 묵객들이 구름같이 찾아오므로 안채 주옥에서 열화당, 별당, 중사랑, 행랑채, 손님들의 공간으로 늘어갔다. '대궐 밖 조선 제일 큰집'으로서 손님 접대에 아낌없었다는 부호, 선교장의 주인처럼 사람들이 편안히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다. 피에르 쌍소의 말처럼 꿈들이 다시 솟아나며, 공상에 불과했던 가능성이 용기만 갖는다면 실제로 가능하리라는 확신에 찼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와서 즐기다 갈 수 있는 곳. 이곳은 함께 꿈을 나누는 공간으로 이상도 공상도 모두 허용되는 공간일 것이다. 고즈넉한 한옥은 휴식처럼 다가왔다. 바쁘고 급한 마음을 멈추고 고요하게 주변 풍경을 바라보게 했다. 쉼이 필요하다면 강릉 선교장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옛것을 보니 다른 곳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오죽헌에 가보기로 했다. 많은 사랑을 받는 역사적 인물이어서였을까, 평일임에도 사람이 많았다. 이이 선생은 끊임없이 정진하였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글로 남겨 후세에까지 알리고 있다. 지극한 효심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꾸준히 정진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사람이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만족하고 머무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적어놓은 격몽요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자기도 성인이 되리라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며 꾸준히 정진할 것이니라.' 율곡이이, <격몽요결>
정진. 힘써 나아감,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게는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명예로운 욕심은 없다. 그저 곧은 사람이 되고 싶고, 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사람'으로서 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속이지 않으며,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사람이다. 쉬워 보이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욕망과 욕심이 살아있는 세상은 더 이상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