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 삼척->봉화 32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나는 생전 처음으로 화장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국립청옥산휴양림으로 향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는 제법 추웠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라고 했던가. 땀을 식혀주던 바람은 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그것은 바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귀마개와 마스크 없는 얼굴이 그것이었다. 아무 방편도 없이 맞서려고 했으니 괘씸하기에 짝이 없다. 바람은 가차 없이 얼굴을 강타했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괴롭혔다. 불친절하고 거칠었다. 요란한 인사와 함께 겨울이 찾아왔다.

휴양림에 도착했다. 야영장 손님은 나 혼자였다. 관리인은 선심 쓰듯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며 자리 선택권을 하사했다. 화장실과 가까운 자리를 택했다. 간혹 냄새가 나는 경우가 있지만, 오늘같이 추운 날에는 짧은 동선이 탁월했다. 텐트를 빠르게 설치했다. 얼른 이 추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로 전해지는 시린 고통을 잊은 채 박차를 가했다. 이보다 빠른 속도는 앞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겨울에 밖에서 또 자면 손을 지질 것이다). 텐트가 완성됐다. 곧바로 따뜻해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패딩을 겹겹이 입고 패딩 바지, 부티를 차례로 입었다. 그리고 침낭으로 들어갔다. 어라? 분명 따뜻해야 하는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여까지 와서 괴롭혔다. 바람은 제 집 드나들 듯 자유로웠다. 한기가 텐트 안을 가득 메웠다(나중에 알고 보니 여름용 텐트였다).


그래, 이건 트루먼 쇼 같은 거야.
분명히 나가는 문이 있을 거야. 나를 보며 낄낄대고 있을 사람들을 엿 먹일 차례라고!


저 멀리 보이는 문 하나. 저기가 바로 탈출구였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인간이 있는 문.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보일러가 작동 중이었다. 바닥이 따뜻한 화장실이라니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무교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외쳐야겠다. ‘할렐루야!’ 변기와 마주했다. 문부터 잠갔다. 다시 변기를 바라봤다. 하얀 베개였다. 변기는 더 이상 똥만 싸는 용도가 아니었다. 최적의 자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변기에 엎드려보기도 하고, 바닥에 앉아보기도 했다. 이 아늑한 공간에서 최적의 자세는 몸을 구겨야 했다. 변기와 벽 사이에 머리를 두고 누웠다. 기역자가 완성됐다. 작은 키가 도움 될 줄이야. 바닥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여기가 천국이고 극락이었다.


보일러 신이여 감사합니다!
화장실에 친히 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당연하더라도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도움을 받을지 모른다. 화장실 덕분에 따뜻하게 하룻밤을 보냈다(화장실을 만나 다행이었다. 그리고 혼자라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있었다면 눈치 보느라 못 갔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