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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삿갓 Dec 23. 2024

EP.32 봉화 -> 영주 36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도보여행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용히 길만 걷는 사람은 특히 그렇다. 사색을 즐기는 자는 말이 없다. 길 위에 온통 사색할 것으로 넘쳐 지루할 틈이 없다.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마치 벌꿀 떼가 붕붕 대는 것 같다. 고상한 취미를 가졌다며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고지식한 사람은 아니다. 사색을 방해했다고 다가오는 것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 내지 않는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말없이 걷다 보면 고고한 분위기를 가졌는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여럿 된다(아, 이건 좀 재수 없었네, 인정한다).

"커피 한잔하고 가요~!"

"오, 좋죠!"


라고 답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덕약수관광지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에서 커피를 얻어 마셨다.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유쾌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갈색 강아지가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무척 귀여웠다. 따뜻한 믹스커피를 손에 들었다. 영업준비를 하던 다른 직원도 삼삼오오 모여 함께 대화를 나눴다. 걱정도 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가족 같은 분위기에 낯가림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남자 사장님은 내 짐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이거 한 번 메봐도 돼요?"


살가운 남사장님은 가방을 한 번 메보려 했다. 무거웠는지 끝까지 메지는 않았다. 본인도 액션캠을 사려고 알아본 것이 있다며 신나게 얘기했는데 옆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니 월급이 300만 원인가!!”

“아이 그게 아이고….”


꼼짝없이 변명하는 걸 보니 부인이 틀림없다. 주방에서 준비하던 사람들도 함께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눴다. 그냥 듣고 있기만 해도 좋았다. 실없는 소리에 소리도 지르고, 등짝도 때리고. 그걸 보며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이마에 손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소란스러움 속에 익숙한 풍경이 겹쳤고, 그리움이 드리웠다.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다 주전자에 눈길이 갔다. 남사장님은 상황버섯으로 우린 물이라며 담아 가라고 했다. 아까 귤 2개도 받았는데 귀한 물까지 얻었다. 남사장님은 나중에 해외로 나가게 되면 자기도 따라가게 가게로 연락 달라고 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가려 하자


"니도 살 좀 빼야겠다, 같이 댕겨와라!"


강아지와 대화하는 남사장님. 마지막까지 유쾌했다. 따뜻한 만남을 뒤로하고 봉화읍으로 향했다. 나중에 꼭 찾아오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길을 나섰다. 기분 좋은 만남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모든 풍경이 아름다웠고, 바라보는 것이 행복했다.


길에서 마주한 인연은 도보여행의 선물이다. 때론 바람처럼 스쳐가고, 때론 나무처럼 깊게 이어진다


안동 권씨 집성촌을 지나 봉화읍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편의점.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마침 개업을 했다고 개업 떡을 건네받았다. 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국밥집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각대를 두고 왔음을 알아챘다. 이제 내 손을 떠났으니 완전히 포기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영주시에 방문한 국밥집 사장님이 숙소에 삼각대를 맡긴 것이다. 숙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국밥집 사장님이 영주시에 볼 일이 없었다면, 삼각대를 다시 볼 수 없었겠지. 우연이 쌓여 만든 행운이었다.


참 ‘운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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