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삿갓 Dec 16. 2024

EP.31 봉화 26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12월, 첫날이 밝았다. 찬 겨울이 시작됐다. 어제보다 추운 날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 일찍 텐트를 정리하고 출발했다. 자전거길을 따라 생각 없이 걷다 보니, 터널 두 개를 지났다. 눈앞에 터널이 또 보였다. 지나고 싶었지만 공사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무진 휴게소에 도착했다. 그곳에 위치한 '무진가든'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방은 분주했다. 예약 손님맞이에 한창이었다. 자리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소심한 나는 이리저리 눈치만 봤다. 딱 봐도 바빠 보이니 기다림이 문제 되진 않았지만, 도보여행자에게 시간은 금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주방 쪽으로 향했다.


"어, 저기... 제육볶음 하나 주문이요."

"좀만 기다려줘요!"


아주머니의 급박한 음성을 듣곤 제자리로 돌아가 기다렸다.

제육볶음은 기름기 가득하고 달달했다. 시골에 가면 할머니가 자주 해줬던 맛이었다. 나는 이 맛을 참 좋아한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밥과 함께 비벼 먹었다.  달달하고 느끼한 붉은 기름기에 중독된 나는 숟가락질을 멈출 수 없었다. 하얀 바닥이 보이고서야 숟가락 설거지를 멈췄다.

현동리부터 보부상길을 따라 걸었다. 산길을 걸었다. 계속된 오르막으로 몸이 지쳐가는 중에 사건이 터졌다. 믿었던 네이버 지도에 발등을 찍혔다. 보부상길이 아닌 길로 빠른 안내를 해준 네이버 지도를 믿고 그대로 향했다. 한 번은 목적지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고, 한 번은 길이 없는 산길로 알려줬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무성한 나뭇가지를 뚫고 지나갔다. 사람 발길이 지나간 흔적을 믿었다. 흔적은 곧 끊겼고 잘못됨을 깨달았다. 보부상길로 되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내리막길은 살얼음 빙판이 됐다. 빙판이 없는 길로 살금살금 내려왔다. 보부상길에 다시 도착했다.

두 번의 선택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찝찝함은 없었다. 스스로를 믿고 끝까지 시도했다는 게 중요했다. 실패로 인해 '네이버 지도만 믿고 가면 안 돼'라는 교훈을 얻었다.


"고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도전이나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래야 주변에 휩쓸리지 않는 힘을 기를 수 있어. 실패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면 된다는 걸 명심해. 그것이 성공으로 끝나든, 실패로 끝나든 책임은 그들이 져 주지 않으니까. 자신을 믿고, 용기를 가지고 시도하길 바래."


길을 잃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연이라 치기에는 로맨스 영화에서 볼 법한 흔한 클리셰였다. 헤어졌지만 서로를 잊지 못하는 두 남녀. 오늘따라 헤어진 마지막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들은 자주 가는 공원 벤치에서 헤어졌다. 그 장소에 도착한 여주인공은 회상에 잠긴다. 혹시나 그가 올까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서는데 마침 풀리는 신발 끈.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신발 끈을 묶는다. 그때 그녀 앞으로 드리우는 그림자, 그림자는 가쁜 호흡을 내쉰다. 그녀가 애타게 그리던 남자다. 뭐 이런 경우였다. 내가 기존의 길을 두고 엉뚱한 길로 간 것은 ‘때마침 풀린 신발 끈’ 같았다.

춘양면 살피재에서 모자(母子)를 만났다. 그들은 반달가슴곰을 닮은 강아지와 함께였다. 가볍게 묵례했다.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겠거니 싶었는데 어머니의 질문이 가는 발길을 붙잡았다.


“추운 날에 고생하시네요. 어디서부터 오시는 길이세요?”

“아, 지금 전국일주 중인데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왔어요.”


대답을 듣곤 일직선 같은 목소리가 대각선으로 변했다.


“정말요? 대단하세요. 그럼, 지금 걸어 다닌 지는 며칠째예요?”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모자에게 이곳 살피재는 매일 다니는 산책길이었다. 가는 방향이 같아 동행했다. 산길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한 발짝씩 내딛는 걸음에 집중했다. 어머니는 천천히 걸었다. 녹음이 내쉬는 숨결, 새들의 노랫소리, 땅의 단단한 감촉.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산책을 즐겼다. 그에 반해 나머지는 빨리 내려갈 생각뿐이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서서히 거리가 벌어졌다. 나와 아들과 강아지는 먼저 내려왔다. 얼마 가지 않아 모자의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와는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 짧은 인연이 끝났다. 여운이 남을수록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데, 내가 그랬다. 다정한 모자가 보기 좋았다. 그들은 두 손 꼭 잡고 걷기도 하고, 아들이 먼저 가면 어머니는 그러려니 말없이 바라봤다. 그들은 살 내음이 되어 오래도록 머무를 것 같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겠지? 우연이란 어쩌면 필연이 아닐까. 그들과 만나게 하려고 나를 엉뚱한 길로 인도한 것 같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이유가 있어 일어난 것일 테니까. 따뜻한 마음이 담긴 사과즙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정말 힘든 날이었다. 길도 잃어버리고, 계속된 산길에 발도, 무릎도 아팠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닦아내려 하지 않았다. 온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어 그대로 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