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아직 새로 사귄 친구는 없다. 작년에 아이들이 친해지며 말을 섞기 시작한 게 언제더라?
3학년의 시간표를 받자마자 고등학교는 학년이 오를수록 반의 의미가 옅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2학년 때 반 친구들과 함께 듣던 수학과 국어가 선택과목으로 바뀌고, 2시간을 차지했던 체육시간이 한 시간으로 바뀌며 나와 우리 반 친구들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수업은 일주일 중 8교시밖에 없었다. 특히 체육은 치명적이다. 작년 학기 초 서먹서먹했던 2학년 7반의 기억을 떠올려봐도 체육시간만큼은 언제 어색했냐는 듯 대화(그리고 비명)을 주고받으며 금세 친해지고는 했다(잠깐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과정으로 무리가 형성된다). 일주일에 50분이라. 현저히 낮은 체육시간이다.
또 다른 문제는 고3이라는 꼬리표다. 선생님들은 고3이 된 우리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자습시간을 주시는 경우가 많다. 자습시간이 되면 우리들은 모두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각자가 가져온 문제집을 펼친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때문에 더더욱, 우리들이 소통할 기회는 없다. 나 역시 이 자동화 시스템을 피할 수는 없다. 이어폰을 꽂고 탐구 영역 문제집을 펼친다. 표지에는 검정 배경에 ‘생활과 윤리’ 또는 ‘세계사’가 적혀있다. 검은색의 두꺼운, 특징이라고는 없는 표지. 그 이상은 없다. 좀 예쁘게 디자인해 주면 좋지 않으려나. 금요일에는 수학을 풀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세계사를 공부했다.
장점이라 부르면 조금 슬퍼지지만, 아무튼 변경된 3학년의 시간표에는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이동수업에 따라 다른 반의 아이들과 섞인다. 그중에는 당연히, 1, 2학년 시절의 친구들이 있다. 요컨대 중학교나 초등학교 시절처럼, 학기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멀어질 만한 사이는 없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나의 경우, 올해 내가 들어가는 동아시아사 수업반 학생중 3분의 2가 작년 우리반의 친구들이다. 아마 작년 나의 반이 세계사 통합반이라서 그런 것이리라. 때문에 우리는 우리끼리 동아시아사 시간을 미니 7반이라고 부르고는 한다. 애초에 3학년 반 친구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어려운 조건이다 보니 오히려 1, 2학년 친구들과의 단합력은 커지는 느낌마저 든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은 있는데”
체육시간. 준비운동을 시작하기 전. 아직 선생님이 오시지 않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와 3명의 친구들(모두 1, 2학년의 친구들이다)중 하나가 말했다.
“지금은 공부해야 해. 고3에서 친구 사귀기는 포기했어.”
그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공감했다. 아마 같은, 그러니까 3학년 9반의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들은 물이 부족한 밀가루와도 같았다. 물이 묻은 일정 부분은 뭉친다(마치 나와 3명의 친구들처럼). 하지만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물은 어디에 있을까. 5월에 소풍을 간다고 한다. 그때의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
공감했다고 말했듯, 나 역시 그렇다. 1, 2학년의 친구들은 너무나도 좋은 친구들이다. 3학년의 우리 반 친구들도 분명 좋은 친구들일 것이다(확실하다. 우리 반에는 전교권, 요컨대 우등생들도 많았거니와, 사고를 치고 다니는 류의 학생은 없는, 성실한 느낌의 반이다.). 그런데 왜 섞이지 못하는가? 아마 모두 비슷한 생각이지 않을까. 시간표가 어렵다. 귀찮다. 공부해야 한다. 등등.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래야 할 명분도 없거니와 이유도 없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 작년 같은 경우에는 고3은 불가능한, 이를테면 유니콘 같은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공부에 대한 집착, 압박감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렇기에 분명 친구 간의 물도 충분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떤가. 다들 저마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마저도 분명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서 그 고민은 싹을 틔우고 있을 것이다. 정말, 학기 초의 이런 분위기가 너무 불편하다. 이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고3. 지금은 더더욱 불편할 따름이다.
작년을 회상해 본다. 나는 사진을 좋아한다. 친구들도 나의 사진을 좋아했다. 2학년의 기억이 더더욱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태블릿에는 사진들이 대부분의 용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 3분의 2가 작년의 친구들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태블릿을 켜면, 무언가에 홀린 듯 갤러리에 들어가 작년의 사진들을 보고는 한다. 인강을 들으려고 켰을 때나. 글을 쓰려고 켰을 때나. 무언가에 홀린 듯 들어가서, 멍을 때리는 기분으로 사진을 하나씩 내리며 보고는 한다. 올해도 이런 사진을 쌓으려나. 5월 봄소풍 때 스테파니를 가져가볼까. 솔직한 나의 생각을 말해보자면, 어려울 것 같다. 정말 그렇다. 고3이 남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 고3은, 작년 마지막 종례시간 담임선생님의 말씀처럼, 고1, 2의 기억으로 버티는 시간이 맞는 거 같다. 아직 고3이 된 지 3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런 3주간 느낀 고3에 대한 나의 감상은 이렇다.
내일은 야자가 있다. 내일 모래는 학원이. 그 다음날에는 3월 모의고사가— 고3은 닥치고 그냥 공부하면 된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이 말을 최대한 부정해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