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ading Fears

술 갠 다음 날

by 셔블

제안서와 기획서를 쓰다

두려움 묻은 염증이 슬며시 밀려와

휴식을 핑계로 '믹스 커피' 두 잔을 말아온다.


누군가 하루에도 열 두잔, 스무 잔씩 마셨다는

믹스 커피...

그 효용성, 그리고 폭력성을 생각한다.


막 끓어 오른 100도씨의 물을 부어

꼭 알맞게 계량된 종이컵에 담아야만

따끈한 제 온도를 맞출 수 있다는 '생존필수템'을

벌써 네 잔째 들이키는 중이다.


'인스턴트'를 질 낮게 여겨

껌도,

라면도, 음료도 일체 마시지 않았던

수십 년의 식습관을 생각 해 보면

참으로 엉뚱한 짓이다.


'블루 마운틴'만 마신다고 했던

대학시절 룸메이트 선배는 조용한 목소리에

적은 말 수, 그리고 밤새 테트리스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선배가 즐겨 입던 검정과 베이지색 두꺼운 모직

코트 자락이 지금도 바람을 스치며 도시를

걷고 있는 것 같아 상쾌하다.


이 기관에서 저 기관으로 넘기고, 이 담당자의 손에서 저 윗선으로 그 지인으로, 그리고 다시

회의 테이블 위에 놓여 지나가는 이의 스치는 한마디 까지 속속들이 검토되어야 겨우 쓰일

이 '좋은 아이디어'를 굳이 종이 위에 재단 맞춤한 '글자와 숫자, 이미지'로 옮기고 싶지 않은

소심한 저항심이

다시 또 한잔의 '믹스 커피'를 부른다.


러일전쟁 직후, 세상 모든 땅이 임자 없는

공공의 것이 된 것일까?

1998년 이후 소수의 달인들만 쓰는 전자정부의

촘촘하고 완벽한 정보들이 사회주의, 실존주의

견제없이 예쁘게 차곡차곡 쌓여

정신의 양극화'를 가르는 장벽을 위해 곶감처럼

저장해 두었던 설탕 입힌 수제 쿠키들을 밑천으로

레시피만 가져와 초연결 가속도로 구운

자동맞춤 입체벽돌로 거듭나며

New Acrovista in the Cloud 같은 브랜드

성채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역시 믹스커피 체질이 아닌가 보다.

응용 레시피 없이 서너 잔 마시는 것을 몸이

싫어한다.

아무리 완벽히 간을 맞춘 음식이라도 먹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어쩌다 딱 한잔이면 좋겠다..


내 것도 니 것도 아닌데, 기계적으로 관리하고

강제하느라 열심히 뛰는 편리하고 지리멸렬한

'시스템'이 배고픈 사자처럼

거리를 서성인다.


반짝이는 '좋은 아이'는 반려견 돌보듯 잘

보살펴야 한다.

아껴 다시 쓰려고 잠시 놓아 둔 다 쓴 종이컵 마냥

여기 저기 덩그러니 놓아두면

오지 않을 '다음' - 그 잠시의 未來가

어느 새 그림자를 드리운다.


'혹시 모를 기회'와 '뻔히 아는 습관' 사이

뱅글뱅글 도는 바람의 밀당에

일회용품의 운명이

오돌오돌 떨며

유령처럼

떠 돈다.


가면만 남기고 떠난

오페라의 노래는

맥 없는

실존증명을 위해

또 한 잔의 믹스커피를 애원하는지

애꿎은

애를 쓴다.


머리에서 꺼내 화면에 옮겨 쓸

'글자와 숫자와 이미지'

-

그 달착지근한 맛이 빠지고 나면

씹던 껌처럼 되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까봐

자긍하게 할까봐

살포시 두려운

시간...


스스로 돌보지 못할 '아이 Deer'는

숲 속에 두어야 한다.


그냥

꿈으로

남아야 한다.


아름다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배고픔이 무엇인지, 배부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굶주린 사자 AI'가

나타나지

않도록...


PS. 삼프로TV에서 평화의 시대 선포와 종전선언이 있을 것이란 내용이 나온다. 2008년 부터 지연되어 오던,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마지막 배수로가 뚫리고, 다시 취약한 조건으로 내몰려 허리띠를 졸라맨 불굴의 노동자들의 힘으로 새로운 신전의 기초공사가 시작되려는 지도 모른다.


끠윽 대는 다섯 마리 백조의 우아한 날개짓인지, 반만년을 내려 온 두루미들(鶴)의 날렵하고 여유로운 춤사위인지… 자려고 누워 어쩐지 팔다리 한번 쭈우욱 뻗어 보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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