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셔블

종이를 긁는 펜촉 소리를 듣고 싶은 밤 - 기묘한 일 하나를 적어두고 잠들려 한다.


우리는 드디어 양조씨와 같은 순수한 인간성에 다소곳이 눈 뜨는 중이다. 전화를 걸어 곧 만나러 가겠노라고 뜸을 들인 다음, 말쑥한 옷차림과 경쾌한 워킹으로 나타난 양조씨는 어떤 용건이 있다는 듯, 주문한 음료 세 잔에 지인까지 초청해 자리를 잡는다.


어라, 종로의 스타벅스도 아닌데, 북적이는 군상 속에 섞여 찾아 낸 듯 자아에 충실한 보통사람 사는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부추꽃 향기 그윽한 9월, 양조씨는 그렇게 자신이 최근에 어떻게 고대국가들의 이름을 달달 외우게 되었는가 하는 것으로 자기 소개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과 마을의 친구들, 물고기 잡으러 온 사방 저수지들을 섭렵하던 개구쟁이에서 차츰 내외하던 이성에 대한 감정이 부드럽게 무르익어가던 시점의 이야기들까지 주르륵 쏟아 놓는다. 행복에 젖어 얼굴에선 윤기가 돈다.


사람들과의 안전한 거리를 선호한다면서도 ‘“여자가 예뻐보인다”고 상대방을 직접 언급하면서도, 결코 기색을 살피는 불안감 하나 없이 자신에 집중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100평이나 되는 홀에는 모여 앉은 삼인과 호기심에 왔다갔다 들여다 보는 또 다른 사나이가 하나 있을 뿐, 이 한 편의 일인극스러운 광경이 펼쳐지는 지금은 호젓하지도 않고 북적이지도 않은 오후 5시 17분이다.


이 허허로운 푸른 들판 한가운데서 나홀로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 이상을 좇는 근대 모던보이들이나 던질 법한 깔끔스러운 고백을 툭-하니 시원하게 털어 놓는 중년의 사나이란 신선하다 못해 기괴한 느낌이지만, 그 표정은 어디 하나 구김없이 쾌청하고 평화로운 딱 이맘 때의 흰구름 뭉게 핀 파란 하늘이다.


과연 매우 흥미롭다.

참으로 그렇다.


이곳은 지금 무엇인가 움트려 하는 새로운 작물의 시대다. 활짝 열린 양조씨의 문이 마지막 남은 후텁지근한 여름 햇살을 아주 기술적으로 마음껏 합성 중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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