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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작가 나혜옥 Oct 31. 2024

노인복지관에서 부부가 함께 배워요

노인복지관에서 부부가 함께 배워요

서른 즈음에는 슬펐던 것 같다. 유행가 가사처럼.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 서른 즈음에>


마흔, 쉰 즈음에는 아이들 키우고

살아내기 바빠서 나이 듦이 슬프지 않았다.

아니 빨리 예순이 되고 싶었다.

예순이 되면 아이들도 자립하고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을 꿈꿨다.


예순이 되니 꿈꾼 것처럼

아이들이 자립하고, 밥벌이를 끝냈다

물론 죽을 때까지 먹고살 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지겨운 밥벌이를 끝냈다.

앞으로 10년을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가고 싶은 곳 가보고,

조금이라도 기억력이 좋을 때

배우고 싶은 것도 배워보고,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만 60세가 되어 가장 먼저 노인복지관에

회원 등록을 했다.

회원 등록을 한 후 강좌를 신청했다.

지난주 회원 등록을 하러 갔을 때,

휴게실에 계신 80대 분들이 쳐다보시는데

못 올 곳을 온 것처럼, 좌불안석이었지만

친절한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씩씩하게 노인복지관 회원이 됐다.


9월에 강좌가 시작돼서 인기 있는 강좌는

모두 모집 마감이 됐다.

우리 부부는 미달돼 있는 강좌 중에

영어 중급반과 맹자, 드로잉 인문학

강의를 신청했다.

수업 시간은 남편 합창이 있는 화요일을 피하고

월요일, 수요일 오전, 오후시간으로 몰았다.

오늘 첫 강의로 영어회화 시간.

"Are you free tonight?"

"Yes, I am. What's up?"


우와~~

나보다 족히 10년은 더 사신 듯 한 선생님은,

멋지게 나이 드셨고, 활력이 넘쳤다.

역시 내 나이는 대면 수업이 최고지!

비대면 줌 수업, 온라인 보수교육은

내 체질과는 정말 맞지 않았다.

50분 수업은 5분처럼 아쉽게 끝났다.

이어지는 팝송 수업을 대기 명단에 올려놨는데

선생님이 결석한 사람 있다고 들어오라고 하셔서

 "The Great Pretender" "Evergreen "

"Oh Carol"를 어깨를 들썩이며 불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교실 분위기에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오후 수업 시작하기 전에

노인복지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4천 원으로 식권을 발급받아 식당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어르신들 사이에 껴서 점심을 먹으려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에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앉아 있나 하는 불편함 속에,

그나마 남편의 흰머리 의지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남편은 퇴직과 동시에 염색을 중단했다.

덕분에 적당히 검은 머리가 섞인 반백발이 되었다.

몇 달 전 병원에서 만난 지인이 남편을 보고,

친정아버지냐고 물어봐서 남편은 울상이 되었고,

나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 후로 가끔씩 남편에게 '친정아버지'라고 부르며 놀렸다.

그런데 그 놀려먹은 흰머리 덕분에 복지관에서

점심을 마음 놓고 먹다니, 오늘처럼 남편의 흰머리가

고마운 적은 처음이었다.


노인복지관 식사는 장조림, 맛살 오이 겨자채,

생선가스, 김치, 고추장찌개로

간이 잘 맞아 맛있게 먹었다.

역시 밥은 남이 해준 밥이 최고다.

한 끼라도 반찬걱정 하지 않고, 거저먹었다는 게

신나서 속으로 콧노래가 나왔다.


오후 수업 '맹자'를 듣기 위해 교실로 이동했다.

맹자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우리에게

다른 한자 수업 공부한 적 있는지 물어보셨다.

우리는 중학교 때 한자수업받은 이후로

처음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용감하다고 하신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


사서삼경은 들어봤다

사서는 대학( 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이라는 것만 안다.

강의가 미달된 게 맹자라 맹자부터 배우러

왔다고 하니까, 선생님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오후 수업이 매일 있고, 결석하시는 분들이

있으니 매일 오라고 하셨다.


맹자 책을 사서 책장을 펼치니

하얀색은 종이요, 검은색은 글자라는 것 밖에 모르겠다.

그래도 간혹 아는 한자가 나오면 반가웠다.

선생님이 선창 하고, 학생들이 복창할 때

큰소리로  따라 읽었다.

남편은 서당에 공부하러 온 것 같다고

한문 시간이 재미있다고 벙실벙실 웃었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천자문을 외울 때

'하늘 천 땅지 검을 현 누를 황 집우 집주 넓을 홍

거칠 황' 하다 말고, 장난기가 발동해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

박박 긁어서 너 한입 나한 입'하면서

깔깔거리던 기억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50년 전 어린 날로 돌아가

서로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라테 이야기'가 시작되면 남편은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이미 들어서 외운 이야기라고 말문을 막으면

"오뉴월 하루 빛에 빤스가 몇 장이 마르는 줄 아냐고"

4살 많은 나이를 들먹이며 거드름을 피운다.


노인복지관에서 수업은 편안했다.

어르신들과 수업을 하니 선생님들의 가르치는 속도가

숨 가쁘지 않아서 좋았고,

모르면 물어봐도 창피하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교육장에서는 젊은 사람 사이에 껴서

수업을 따라가려면 몰라도 물어보지도 못하고,

어물쩍 넘어갔다.


그런데 노인복지관은 자격증을 따는 것도 아니고,

진도를 맞춰야 하는 숨 가쁨도 없으니

수업이 여유가 있어 좋았다.


남편은 때아닌 공부 복이 터졌다고 몇 가지를 배우는지

손가락으로 세면서,

합창단 악보 외워야지, 기타 연습해야지,

2학기 신앙교육원 성경공부해야지,

거기에다 영어에 한문까지

이러다 머리가 터지는 거 아닐까 하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나는 남편에게 걱정 말라고 말했다.

당신 머리는 저장고가 아니라 길이라고 한 쪽 귀로 들어왔다가

머리에 잠깐 머문 뒤 다른 쪽 귀로 나가버리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하라고 했다.

남편은 내 말이 맞다고 껄껄 웃었다.


배움의 즐거움이 좋아서,

노년의 여유로움이 좋아서,

꽉 차진 일일 계획표가 있어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처럼

마냥 설레었다.

점심밥까지 해결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인생 2막 슬기로운 부부생활

노인복지관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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